구월은 마중 나가는 달이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마중하고 여름 내내 뙤약볕에서 흘린 땀의 결실을 만나기 위해 마중 나간다.
어디 그뿐인가. 첫 수확한 쌀로 올개쌀을 만들어 밥을 지어 우리네 마음 바치러 나가는 한가위가 들어 있는 달 아니던가.
나에게는 두 종류의 추석이 잠들어 있다. 열두 살 이전의 추석과 그 이후의 추석. 열두 살 이전의 추석은 나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코끝을 씰룩거리게 한다. 아이 폰 하 나로 추석상도 차릴 수 있는 21세기에 살면서도 난 한가위가 다가오면 환청을 듣는다. 쿵~덕 쿵~덕!
시골 우리집에는 디딜방아가 있었다. 오십여 채 되는 마을에서 딱 두 집만 가지고 있었다. 큰집과 우리집. 우리 큰집은 대문도 높고 안채 아래채 그리고 바깥채까지 갖추고 사는, 소위 부농이었다.
그런 반면, 우리집은 안채밖에 없는 소박한 집이었지만 동네 사람들의 발길을 끊임없이 불러들였다. 그래서 인지 명절이 다가오면 우리집 디딜방아는 숨을 헉헉거리며 떡을 찧어 냈다.
큼지막한 세라믹 시루에 맵쌀을 불려 안치고 솥과 시루의 틈새를 밀가루 반죽으로 야무지게 허리띠를 조른 다음, 추석맞이를 위해 준비해 놓은 땔감으로 불을 뗀다.
잘 불린 쌀이 시루 안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고슬고슬 익어 가면서 풍기는 향은 내 코를 씰룩거리게 했다. 그 고소한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등에 상처난 딱지처럼 찰싹 업혀 있는 동생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가 시루 뚜껑을 확 열어 제치면 마치 질식이라도 할 뻔 했다는 듯 김은 무리를 지어 시루를 빠져나갔다. 김이 빠져나간 자리에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던 하얀 쌀. 나는 그토록 도도한 쌀의 이미지를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쪄진 쌀을 미리 맛본다는 건 언감생신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시루 허리를 감싸고 있던 잘 익은 밀가루 반죽은 부담 없이 나의 차지가 되었다.
뽀송뽀송하게 쪄진 쌀은 곧바로 디딜방아의 절구통으로 옮겨졌다. 절구통은 땅에 반쯤 묻혀 있었다. 생김새가 여치같은 디딜방아로 떡을 찧는 데는 서너 명이 힘을 모아야 했다.
두세 명이 여치 꼬리 부분을 발로 밟으면 여치 입쪽은 절구통에 들어 있는 찐쌀을 쿵~덕~ 쿵~덕~ 찧어 냈다. 방아가 한 번 고개를 쳐들 때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계속 절구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찐쌀을 뒤집어 주어야 했다. 그 옆에는 큼직한 대접에 물이 담겨져 있었다. 찐쌀을 한 번 뒤집을 때마다 손을 그 물에 적셔 끈적거림도 방지하고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도 했다. 마치 스시맨이 밥을 한줌 집기 전에 찬물에 손을 담그는 의식과도 같았다.
그토록 도도하던 쌀이 디딜방아에 의해 반죽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서서히 거듭나기 시작했다. 서로 떡 품앗이에 참여한 동네 아주머니들은 더욱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쿵~덕~ 쿵~덕. 절구통에 들어 있는 반죽이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찰기가 지면 대청마루에 깔려 있는 떡판으로 옮겨 반죽을 골고루 폈다. 아직도 뜨거운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반질거리는 흰떡 반죽 위에 포르르 뿌려지는 콩가루는 마치 여인의 얼굴에 뽀얗게 피어오르는 분가루 같았다.
콩가루가 빈틈없이 잘 다독여지면 팔뚝이 굵은 아주머니가 보름달 같은 무쇠솥 뚜껑을 들고 나타난다. 그 반질반질한 무쇠솥 뚜껑이 따끈따끈한 떡판 위를 슥슥 질주하고 나면 떡판은 어느새 바둑판이 되어 있었다. 반듯한 바둑판에 들지 못한 부분은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그 긴 시간 동안 싸돌아다니지 않고 대청마루 끝에 앉아 기다린 보람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정품에 들지 못하고 잘려나간 하치를 한 입 베어 문 내 볼따구니는 터져나갈 듯 울룩불룩 거렸다.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하치도 고소한 떡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한가위가 다가오면 난 괜스레 한국마켓을 들락거린다. 그러다가 색색깔의 떡을 보면 쿵~덕거리는 환청에 이끌려 주저하지 않고 한아름의 떡을 안고 마켓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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