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진다’라는 말에 나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가벼워진다’라는 것은 김훈 ‘화장(火葬)’의 끝머리에 나오는 여름 화장품 광고 이미지 문안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자의 감정이 냉정하도록 배제된 작품이다. 상황묘사만 치밀하도록 세세하게 해 놓아 그 광경을 마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작품이다. 그런데 나는 왜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뚝방 터진 듯이 그렇게 펑펑 울어야 했을까. 내게 더덕더덕 붙은 삶의 군상들을 모조리 툴툴 털어 화장(火葬)시켜버리고 훌훌 날고 싶었을까.
김훈 ‘화장’은 2004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품이다. 김훈 선생이 1948년 5월 5일생인 것을 감안해 볼 때, 아마 이 작품을 썼을 때는 현재 내 나이 보다 두서너 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우린 어쩜 이만한 나이에 느낄 수 있는 삶의 공통점에서 만난 것일까? 이 소설 중간쯤에서 여름화장품 광고 문안으로 ‘가벼움’과 ‘내면여행’을 놓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나는 어느새 ‘가벼움’을 선택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5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망설임 없이 ‘내면 여행’을 선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만 해도 과거 속으로의 여행이라든가, 나의 내면 세계를 탐지하는 일에 상당히 집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내면 여행’이라는 말이 관념적이라기보다 삶의 무게가 느껴져 버겁다. ‘내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이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왜 생이라는 무게를 슬며시 내려놓고 싶은 것일까. 작중 화자도 ‘가벼워진다’를 선택하고는 깊은 잠에 빠진다. 그 역시 삶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2003년, 크게 교통사고를 당한 후, 생명보험에 가입할 때만 해도 할머니를 닮아 오래 살 것 같았다. 보험설계사가 자연 나이 팔십을 기준으로 보험금을 계산하고 있을 때, 그보다 더 살 것 같아 은근히 걱정되었다. “팔십이 되면 넣었던 보험금은 어떻게 돼요?”라고 물었을 때, 소멸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 많은 보험금을 넣고도 팔십 세를 넘기면 헛일이잖아요?”라고 하자, 보험에 가입한 지 2년만 지나면 자살을 해도 탈 수 있는 보험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지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보험금을 타려면 팔십 세가 되기 하루 전날 목숨이라도 끊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계약을 성사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그 젊은 설계사는 매달 내야 할 돈을 걱정하면서 왜 굳이 장기 보험을 들려고 하느냐고 내게 나무라듯이 말했다. “싸늘한 시체만 남기고 갈 수는 없잖아요. 나는 아이들에게 남겨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속으로 답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팔십은 고사하고 쉰여섯에 돌아가신 아버지만큼이라도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웨스트 버지니아 시골 길을 달리다 문득 혼자라는 느낌에 깜짝 놀랐다. 그 오랜 이민생활 동안 어떻게 친구 한 명 사귀지 않고 살았을까. 촌스럽게도 나는 외롭다거나 아프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내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대어 오히려 사람을 피하여 숲 속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오늘, 김훈의 ‘화장’을 읽으면서 사람들에게 지쳐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그 북적댐의 원천이 어디에서 왔는지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하루에도 수없이 만나야 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화장(化粧)으로 적당히 덧칠하고 만났던 사람들이다. 작중 인물이 아내의 빈소에서 슬퍼할 겨를도 없이 회사 업무를 수행해야 했듯이. “살만하면 죽더라!” 실제로 그런 사람도 보았고, 소설 속의 아내도 그러하다. 또 주변 사람들의 말도 이제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차라리 깨끗하게 고통 없이 단번에 죽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내 몸이면서 내 몸이 아닌, 소설속의 주인공처럼 삭정이처럼 드러난 뼈대를 남에게 맡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 어느 날, 부질없는 일일지라도 글줄이라도 쓰다가 곤하게 잠든 사이 그렇게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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