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유독 그리움이 짙어진다. 옛 생각에 코끝이 찡해지다가 눈물이 뺨을 타는 계절, 가을은 역시 나를 울보로 만드는 계절이다. 그래, 이맘때쯤이었지. 고향의 하늘이 맑고 높은 날을 택해 어머니는 이불과 요의 홑청을 냇물에 내다 빠셨다.
빤 홑청은 솥에서 잿물에 푹 삶아지고 다시 냇물에서 깨끗이 헹궈졌다. 땟국이 꾀죄죄하던 홑청이 하얘지면 풀이 먹여지고 높은 빨랫줄에서 한나절을 펄럭거리며 말려졌다. 고슬고슬한 홑청은 방망이로 실컷 두들겨 맞고서야 살그머니 주름을 내려놓고 다소곳해졌다.
해가 서산에 걸릴 때쯤이면 언제 땟국이 묻었었느냐는 듯 해맑은 얼굴로 바삭거리는 홑청은 이불과 요에 끼워졌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마련된 요에 눕고 푸새한 이불 홑청을 살며시 만지작거려 보는 맛, 행복은 그리 쉽고 단순한 가운데 존재하였다. 그 까슬까슬하고 차가운 듯 산뜻한 이불 속에서 나는 온갖 시름도 잊고 길고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그 깨끗한, 아니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이불 때문에 어느 하룻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운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말경 웅변선수로 선정된 나는 고춘자 선생님께 웅변원고를 부탁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남편께 부탁하자며 그분의 집으로 함께 가자 하셨다. 그 선생님은 제주시에서 시골 중학교로 매일 버스로 통근하고 계셨다. 기꺼이 승낙하신 선생님의 부군께서는 웅변원고에 몰두하셨지만, 밤이 이슥할 즈음까지 원고가 마무리되지 않자 나는 초조해졌다. 11시경에 있는 마지막 버스를 탄다 해도 먹물처럼 캄캄한 그 밤에 버스종점에서 우리 집까지 사십 분을 걸어갈 게 무서웠다.
선생님은 나의 고민을 눈치채셨는지 하룻밤을 그곳에서 자고 가라며 이부자리를 준비해 주셨다. 갓 결혼하신 그 선생님께서 내 주신 이부자리는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는 새 내음이 은은하고 뭉게구름이 가득 들어 있는 가볍고 폭신한 이부자리였다. 이불감은 양단인지 공단이지 확실히 몰랐지만, 무늬와 색상이 화려했고 새하얀 홑청의 가장자리에는 가느다랗게 예쁜 수가 놓여 있었다.
그렇게 고급스러운 이불을 본 적이 없었기에 나의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그런데 이 어이한 일인가! 그 화려한 이불 속으로 들어간 나는 공주나 된 듯이 기뻐해야겠지만 몸과 마음이 한없이 거북했다. 마침 겨울이어서 고작 한 달에 한두 번 하는 목욕을 한 지가 꽤 오래되었으니 그 새하얀 요 위에 때가 묻어나올 것만 같아서 잠은 도통 찾아주질 않았다.
뒤척거리면 때가 더 담뿍 묻을 것 같은 두려움에 들보처럼 꿈쩍도 못하고 눈만 말똥말똥한 채 밤을 지새웠다. 꿈에서조차 여태 그려본 적이 없는 그 아름다운 이부자리가 결국은 가시방석 못지않게 불편한 밤을 낳고 말았다.
햇빛이 황금 싸라기를 후하게 뿌려주는 가을날 햇볕과 바람을 안고 나풀대던 새하얀 옥양목 내음이 코끝에서 맴돌며 서성거린다. 고향의 산과 바다가 눈에 선하고 끝없이 맑은 가을 하늘이 나를 부르는 듯하다. 고춘자 선생님의 따스함에 재삼 고개가 수그러지고 웅변대회에서 2등의 영광을 안기게 멋진 웅변원고를 써 주신 그분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가슴속에 간직하고 살면서도 찾아뵙기는 커녕 안부편지조차 못 드리고 뜀박질만 해온 세월, 이제 아쉬움과 후회가 엉클어져 가슴을 죈다.
하룻밤 내가 황홀하지만 불편하게 품었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이불은 지금쯤 어디로 갔을까?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역시 가을 탓이리라. 그 두 분 모두 행복하고 강녕하시길 빌며 죄스러운 마음으로 고국을 향해 서쪽 하늘을 올려보는데 갈바람이 위로라도 하는 듯 나의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져준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