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핸 숫제 봄을 만나지 못했다. 앞마당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걸 설핏 본 듯도 한데 한밤 자고 나니 바람결에 다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 밤새 내린 비에 다 씻겨갔는지도 모른다. 봄은 사랑의 징표도, 그리움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훌쩍 떠나고 말았다. 분주한 일상에 넋 놓고 살아가는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봄을 놓친 셈이다.
“김형, 늦봄 보내러 산에 가지 않겠소? 산에 올라 흐르는 내에 발 담그고, 나무숲 솔향에 취해보면 세월 흐르는 소리가 사각사각 납니다. 떠나가는 봄 마중도 않고 어찌 무심히 나이만 먹겠소? 이젠 우리도 가는 세월 자락마다 감사의 노래를 한 아름 꽃다발로 엮어 안겨 보내야 할 때가 되었소.”K선배님의 전갈이 고맙다. 자연을 좋아해 수시로 산행하며, 바다나 강 낚시를 즐기시는 두 내외가 내 마음을 아셨는지 동행하길 권하신다. 숲 속에 하루 밤 야영할 채비를 다 해 놓았으니 몸만 왔다가라고 하신다. 격의 없고 밝은 인품 때문에 마음이 시릴 때마다 연락드리면 넉넉하게 감싸주신다. 어떤 불행도 잘 타일러 행복으로 바꿀 만큼 긍정적인 사고와 실천력의 소유자이신 선배님께 등을 기댈 수 있는 게 감사하기 그지없다.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고개 넘어 바로 태평양 바다이고, 도시를 벗어난 게 얼마 안 되는데 이렇게 깊은 숲이 있는 줄 몰랐다. 봄을 보내는 숲은 꽃들이 분분히 흩날리고 초록빛 잎사귀들이 더욱 촉촉해져간다. 나무 그늘 사이로 내가 졸졸 흐른다. 지난주 내린 비로 물이 제법 불었다.
“이 내는 이 맘 때 바다에서 연어가 올라오는 모천(母川)이라오. 코호(coho)도 있고, 제일 작은 핑크 종도 있지요. 매년 숫자가 줄어 안타깝지만, 연어의 귀천을 보러 이곳에 옵니다.”모천에서 부화한 치어들은 바다로 내려간다. 한 어미가 낳은 수천, 수만 개 알에서 살아남는 건 고작 열 마리도 안 된다고 한다. 수명이 4~5년 되는 성어들은 알래스카까지 천 마일을 헤엄칠 만큼 강하다. 산란 때면, 신통하게도 모천을 찾아 올라온다.
“김형, 연어들이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오는 지 아시오? 냄새로 안다오. 소위 후각기억장치가 유전자 속에 녹아있다는 게요. 내 아들 녀석도 부모 품 냄새를 맡고 올라오고 있을 게요. 그놈도 연어처럼 큰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강인한 효자였으니까..”지난 봄, 뜻하지 않게 산악자전거사고로 세상 뜬 큰아드님을 그리워하는 말씀에 마음이 저민다. 아버지를 닮아 아웃도어 스포츠에 만능인 젊은이였는데 비오는 날 미끄러운 바위에서 순식간에 당한 사고가 아직도 악몽처럼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갓 40인 건장한 아들을 잃은 참척의 슬픔을 당하셨음에도 주어진 삶을 매일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그 의연함이 존경스럽다.
“사랑하는 아들은 내 가슴에 살아 있소. 함께 살았던 세월들도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소. 연어가 고향으로 올라오듯, 아들도 이렇게 비오는 늦봄이면 나를 찾아옵니다. 연어를 기다림은 아들을 기다림이지요. 그 녀석은 틀림없이 어미의 젖 냄새, 아비의 땀 냄새를 맡고 열심히 헤엄쳐 올 테니까..” 잃어버린 줄 알았던 향기로운 봄 내를 연어들을 기다리는 냇가에서 종일 벅찬 가슴으로 맡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