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선 <전 한인회장>
새벽녘 집을 나서는데 두툼한 외투 사이로 냉기가 들어왔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추위는 몸보다 마음을 움츠리게 했다. 일상에서 잠시 비켜서고 싶다는 생각에 아내와 뉴욕 인근에 있는 조각공원으로 향했다. 긴 세월동안 유명 작가의 작품들과 어울려 또 하나의 작품이 되어버린 주변의 나무들은 어느새 잎새를 모두 떨구고 침묵하고 있었다.
내 삶이 저 나무처럼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기를 소망해 보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잿빛 하늘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운무(雲霧)로 계곡을 휘감더니 이슬비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는 시간, 그 자리에 서 있음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전화기 너머로 낯선 이의 다급한 음성이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이유 없이 불길한 느낌은 늘 빗나가지 않는다.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자신의 차로 옮기고 경찰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때처럼 간절한 기도를 했던 적이 있었던가? 늘 이기적인 나의 기도조차 헤아려 주시리라 믿으며 서둘러 사고 현장으로 갔다.
아내의 차와 가해자의 차가 흉물스럽게 엉켜 있었다. 다행히 아내는 크게 다치지 않았고 때마침 지나가던 그녀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차에서 빠져나와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무사해준 아내가 고맙고, 아내를 도와준 천사 같은 그녀에게 감사했다. 경황이 없어 그녀의 연락처를 받아두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리지만 잊지 않고 다른 이에게 대신 돌려주리라 생각하고 있다.
최근 가까운 지인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누가 보기에도 부러울 것이 없었던 그였다. 사람들은 그의 사회적 성공을 보고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으나 그의 성공은 성실함이 가져다준 선물임을 나는 안다. 그는 살면서 만나는 어려움에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할 줄 알았고, 그가 지닌 재물로서가 아닌 마음으로 여유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날마다 한사람씩을 행복하게 하는 게 성공이라면 그는 날마다 성공하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하게 한 사람이다.
석 달 남짓 병원신세를 지면서도 늘 웃음 가득한 얼굴로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에게는 나쁜 소식도, 좋은 소식도 오늘을 기쁘게 살게 하는 선물인 듯 했다. 그는 분명 선물로 받은 남은 생애를 더욱 감사하며 살 것이라 믿는다.
그의 이름은 ‘구스타프’ 이다. 그는 낯선 휴가지에서 아침 식사 때마다 만난 웨이터였다. 언어가 다른 그는 특유의 선한 미소로 나의 움츠려진 경계와 두려움을 조금씩 무너뜨리며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내내 처음 접한 음식을 하나씩 설명함은 물론 우리들의 식사 속도까지 세심하게 살피며 서빙을 했다. 행여 우리들 중에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어느 사이에 옆에 서서 선한 웃음으로 불편한 부분을 도와주었다. 기쁘게 일한다는 느낌과 그 미소에 반해 아들 또래인 그에게 일 하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고 말을 건넸다.
허리를 굽혀 이야기를 듣던 그가 이십년 전 그의 아버지가 이 식당의 웨이터였고, 그도 그의 아버지처럼 이 식당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얘기했다. “오늘이 행복하면 틀림없이 내일은 더욱 행복합니다. 저는 어제도 정말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가 서툰 영어로 전하던 이 말이 오랫동안 잊혀지질 않는다. 일상에 지친 시간을 위로 받고 싶어서 찾은 휴가지에서 만난 이 청년의 환한 미소는 우리 모두에게도 선물이었다.
무성한 나뭇잎이 하늘을 가릴 때는 어두워 발밑도 보이지 않던 나무들이 서로 마주보며 비워진 숲을 지키는 계절이다. 서로 발밑을 살피고 온기를 나누며 함께 따뜻해지는 겨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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