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 송년기획: 사양업종을 지키는 한인들
▶ (1)‘짱 아저씨’의 희망노래
짱 아저씨가 가게를 찾은 한인 할머니에게 비디오 테입을 대여해 주고 있다.
또 한해의 끝자락이다. 바닥을 모른 채 수년 째 이어지고 있는 불황 여파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경제를 짓누르면서 2014년 새해를 앞둔 뉴욕일원 한인사회도 여전히 먹구름이 가시지 않은 형국이다. 본보는 송년특집 기획으로 이제는 사양 업종이라는 불리는 열악한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맡은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희망을 얘기하는 한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1>짱 비디오 아저씨의 희망 노래
허리가 반쯤 휘어진 78세 할머니가 수줍은 표정으로 밀린 외상값 15달러를 내밀자 ‘짱 아저씨’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뭘 이런 걸 가져오셨냐”고 기분 좋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반찬가게에서 300달러가 조금 안 되는 주급을 받았다는 할머니는 “요즘처럼 각박한 때 이렇게 외상을 해 주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기자에게 연신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신을 향한 칭찬이 부끄러웠던지 짱 아저씨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서 10개 남짓한 비디오 뭉치를 비닐봉투에 넣곤 황급히 할머니에게 건넸다.
“할머니, 이번에 새로 나온 이 드라마 재미나요. 아마 좋아하실거요.”
일명 ‘짱 아저씨’로 통하는 스티브 심(60)씨. 그는 2005년 사업에 실패한 이후 다시 재기를 목적으로 ‘짱 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하고 있다. 한글 간판들이 빼곡한 뉴저지 팰리세이즈팍 브로드 애비뉴 선상에 위치한 짱 아저씨 가게는 한 때 300여대의 비디오 복사기계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돌아갔다. ‘대장금’과 같은 국민 드라마가 출시되는 날이면 사람들은 줄을 섰다. 직원도 4명이나 됐다. 그 땐 공 비디오테잎이 모자라 ‘꼭 반납해 달라’는 말이 ‘또 오세요’라는 말보다 더 많이 나오던 때였다.
그러나 인터넷 사용인구의 증가와 케이블 텔레비전을 통해 한국 방송을 접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짱 아저씨’의 비디오 가게는 마치 골동품 아닌 골동품을 취급하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300대의 비디오복사기계는 10%만이 하루 몇 시간 간간이 테입을 뱉어낼 뿐이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무한도전’이나 ‘일요일일요일 밤’과 같은 예능프로는 2개를 복사해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은 손님들에게 ‘비디오테입 반납 안 해도 된다’고 말한다.
짱 아저씨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든 게 대략 2008년부터였다고 말한다.
‘짱 아저씨’가 처음 비디오 가게를 인수했을 땐 물론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실수였고 실패였다. 그래도 짱 아저씨가 얻은 게 있다. 바로 사람이다.
기자가 취재를 위해 머문 2시간 동안 가게를 찾은 손님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이들은 짱 아저씨와 단순히 비디오와 돈을 주고받는 사이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곶감 먹어보라고 가져다주는 분도 있고, 곗돈 맡기는 분도 있어요. 오며가며 자식 자랑하는 분, 며느리 흉보는 할머니… 여기는 사랑방이에요. 그 재미로 이 장사하는 거지요.”
이처럼 짱 아저씨를 찾는 고객의 95% 이상은 70세를 훌쩍 넘긴 할머니, 할아버지들. 대부분은 자녀들과 떨어져 살고 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한국 방송을 보는 법을 몇 번씩 들었지만, 자녀들에게 또 물어보기가 미안해 그냥 비디오를 빌려보는 노인 분들이 짱 아저씨의 몇 안 남은 단골인 것이다.
“저렇게 나이 든 분을 보면 꼭 우리 어머니 보는 것 같아요. 어쩌겠어요. 저 분들의 유일한 낙이 비디오라는데. 돈 좀 덜 벌리면 제가 점심값 좀 아끼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짱 아저씨는 갑작스러운 어머니 생각에 카운터 뒤로 연결된 문에 기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20분쯤 지나자 가게를 찾아온 할아버지가 짱 아저씨에게 한달 분량의 일일드라마 봉투 뭉치를 건네받고 문을 나섰다. 몸이 불편한 부인과 단 둘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할아버지라고 했다. 한국 할아버지 특유의 근엄함은 표정에 묻어났지만 조금 있으면 새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감춰지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이 물어봐요. 혹시 그만 둘 생각이 없냐고. 그 때마다 사실 저런 분들을 떠올리게 돼요. 끝까지 한 번 가보려고요.” 그래도 짱 아저씨의 가게는 사실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한다. 더 이상 그 어떤 전자회사도 비디오 기계를 생산하지 않을 뿐더러, 비디오 테잎 역시 구할 곳이 이젠 없기 때문이다. 300대의 기계의 수명이 다하는 날. 그리고 테잎 속 필름이 늘어나는 날이면 짱 아저씨도 가게의 문을 닫아야 한다.
짱 아저씨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걱정 마세요, 제 고객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 저는 내일도, 내일 모레도 열심히 비디오테입 복사하고 있을 겁니다.”절망을 이야기해야 할 시점, 짱 아저씨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함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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