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흠모한 그가 생각난다. 부조리(不條理)의 작가 알베르 카뮈다. 이 작가가 1947년에 쓴 ‘페스트’는 제목처럼 페스트가 휩쓴 알제리의 오랑을 무대로 한다. 이 해변도시는 폐쇄되고 공포와 절망이 엄습한다. 중세의 사람들은 신이 내린 형벌이라며 신의 뜻에 따르자고 한다. 인습은 완고했다.
하지만 루라는 의사와 타루라는 나그네는 이성의 길을 걷는다. 진료소를 설립하고 자원봉사대를 조직한다. 선의의 사람들이 그네들 곁에 모인다. 사람들은 하나둘 죽어나갔지만 긴 싸움 끝에 마침내 도시의 문은 다시 열리게 된다.
작가는 말한다. “절망과 맞서는 길은 행복에 대한 의지다.” 오랑의 사람들이 페스트를 이겨낸 동력은 지성에 뿌리박은 아름다운 연대성이었다. 그것이 결국 행복을 찾아주었다.
코로나19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상상력을 뛰어넘은 속도와 통념을 비켜가는 감염력으로 세계를 마비시키고 있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식당과 술집에서의 왁자지껄한 흥취는 자취를 감췄다. 일상은 사라졌다. 봄꽃은 저만치 혼자 피어 있고 두려움은 6월의 회색빛 안개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소설 ‘페스트’가 연상되는 혼란이다.
미증유(未曾有)의 역병의 창궐 앞에서 아직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정부는 국민에게 스스로를 위리안치시키라고 권할 뿐이다. 치료 백신은 올해가 끝날 때쯤이야 세상에 나올 전망이다. 무망한 일이다.
삶은 갑자기 비틀대기 시작했다. 생활전선이 무너지면서 식당의 업주와 웨이트리스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여행사 직원들은 숨조차 쉬기 힘든 시간임을 토로한다. 어느 한인 보석상은 스스로 문을 닫아걸었다. 덩달아 한인사회를 어지럽히던 교활하고 아둔한 무리들의 혓바닥 놀림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페스트가 만연하자 피렌체의 별장에 몸을 맡긴 10명의 신사, 숙녀들이 있었다. 그네들은 오후의 가장 더운 시간, 나무그늘 아래 모여 열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무람없고, 재지(才智) 넘치고, 쾌활하게….
그네들처럼 이승과 저 세상 모두와 담을 쌓은 듯 비켜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데카메론’보다 더 절박하다. 우리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할 이 역병과 짧지 않은 투쟁을 해야 될 지도 모른다.
문명은 인간의 무지와 탐욕과의 투쟁이었지만 전염병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 고단한 전사(戰史) 속에서도 인류가 무너지지 않았던 건 공동체 정신 덕분이었다. 그것은 함께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 시련이 나만의 것이 아니며, 함께 싸워나갈 때 극복할 수 있다는 연대의 정신이다.
흉년이 들면 대문 앞에 쌀독을 내놓아 배고픈 이들이 퍼갈 수 있게 했던 경주 최 부자의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하지만 우리 한인들은 상생이란 아름다운 연대의 정신을 이미 실천하고 있다. 대구경북 돕기에 너도나도 앞장서고, 애난데일의 한 건물주는 세입자들의 고통을 헤아려 격려금을 내놓았다. 여행사에는 격려의 말과 선물이 이어지고 있다 한다.
이 우울하고 엄혹한 시대에 무기력과 절망은 가장 큰 적이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용기가 된다. 어려움에 빠진 주위의 한인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환난상휼(患難相恤)의 공동체 정신이 빛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함께 거친 운명과 대결하는…. 그럴 때 우리는 이 격리의 시대를 빠른 시간에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연대에 의해 행복을 얻는다는 카뮈의 철학이 다시금 조명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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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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