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이 한창이라기에 데시칸소 가든으로 달려갔더니, 꽃은 이미 떠나고 없다. 대신 라일락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나칠 때마다 향기가 나를 붙든다. 학교 교정에서 맡던 그 향내다. 하늘은 맑고, 산들바람이 뺨을 스친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 막내는 중학생이었다. 꽃과 새를 좋아하던 아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든을 누볐고, 나는 남편과 그늘에 앉아 쉬었다. 한참 뒤 지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여줬다. 하늘은 파랗고 꽃향기는 그윽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그 아이가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됐다. 아직도 작은 기차가 원내를 돌고 있다. 이번엔 타보자고 슬쩍 꼬드겼더니 손사래부터 친다. 그때도 그랬는데. 언제쯤 저 기차에 올라탈 생각을 할까. 딸이 픽 웃으며 묻는다. “혹시 엄마가 타고 싶은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겠다.
라일락 향기는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간다. 원주 기차역. 외갓집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서울 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날이었다. 동생이 철둑을 넘어 철도 위로 뛰어가고, 엄마 아빠가 뒤쫓는 사이, 나는 두 분 사이에 끼어 허름한 나무 벤치에 앉았다.
머리 위로는 분홍 라일락이 만발했다. 작은 꽃송이들이 혹여 떨어질세라 뭉쳐서 피는 꽃. 할아버지께서 나직이 말씀하신다. “벌 조심해야지. 라일락은 향이 세서 벌이 많아.” 정말이다. 의자 위로, 꽃 사이로, 윙윙거리는 벌의 날갯소리가 가득하다. 우리는 옆 벤치로 옮겨 앉는다. 왜 그날 거기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현기증이 날 만큼 황홀하던 그 향기와, 할아버지의 목소리만큼은 지금도 선명하다.
발길을 돌리니, 화단에 아이리스가 피었다. 흔히 보던 아이리스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내 주먹보다도 큰 꽃이다. 보라색과 노란색이 나란히, 보란 듯이 서 있다. 보라색 꽃잎을 보는 순간, 고흐가 떠올랐다. 고흐도 이런 아이리스 군락 앞에 섰겠지. 그리고 나처럼 한동안 바라만 보지 않았을까.
창날 같은 아이리스 잎사귀 사이로 나비 한 마리가 한가롭게 난다. 모나크 나비만큼 크지는 않지만, 집 주변에서 보는 나비보다는 크다. 이윽고 한 무리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닌다. 마치 동네 사람들이 이 집 저 집 마실 다니듯, 바쁘지 않게, 서두르지 않게. 하긴 여기는 이들의 집이다. 우리는 이 가든에 구경 온 나그네고.
그늘진 벤치에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본다. 나비에게 목적지 같은 건 없어 보인다. 그냥 꽃이 좋아서 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도 오늘 그랬다. 튤립을 보러 왔다가 라일락에 붙들리고, 그 향기에 이끌려 원주 기차역까지 다녀왔다가, 아이리스 앞에서 고흐 곁에 잠깐 서 있었다.
계획한 것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봄날 오후의 데스칸소 가든에서, 나도 잠시 나비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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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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