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건 목사(뉴저지 베데스다교회)
마태복음을 읽다가 요셉이라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남편으로 소개되는 요셉이다. 이 사람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배경 속에 숨어 있는 인간들의 갈등과 헌신의 행적을 미루어 보게 되었다. 한 생명이 태어나고, 우리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가오기 위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요셉의 행적에서 몇 가지 생각케 하는 것은, 그와 약혼한 사이였던 마리아가 잉태된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이다. 남녀 관계의 삶의 규범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여전히 구약의 규범이 살아 있었던 때였고, 그 규범에 의하면 자칫 마리아의 목숨이 위태할 수 있었다.
정절을 저버린 여인에게 당연히 따를 것은 죽음의 심판이었다. 율법이 그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혹 요셉의 인간적 좌절감이 그런 충동을 갖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가 취한 결론은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마1:19) 마리아를 향한 최상의 동정과 자기 극복의 결과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율법의 요구와 대치되는 것이기도 했다.
죄를 그대로 두는 것은 율법의 정신을 저버리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거룩성이 침해되었는데도 그것을 방관하는 것이 아닌가? 더 나아가서 죄를 방조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특이하게도 마태복음은 그런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거스리는 사람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신약성경, 또는 마태복음은 구약성경과 다른 의의 기준을 갖는 것이 아닌가? 묻게 된다.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의란 말일까?
요셉의 행적은 적어도 의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의는 죄인을 처벌하는 의가 아니라 죄인을 살려주는 의임이 분명하다. 그 의는 긍휼로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여진다. 요셉은 긍휼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긍휼이 자칫 돌에 맞아 죽을 여인을 살게 해 주었다.
요셉의 의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 마리아의 잉태의 배경을 들었을 때, 그는 그 사자의 말을 믿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 도대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유사 이래로 그런 실례가 있었다면, 믿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꿈에 나타난 주의 사자의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의혹과 분노의 감정이 남아 있을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믿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얼마나 얽매여 사는가! 우리들 삶 속의 갈등과 좌절은 우리들 감정에 충실한 열매가 아니었던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서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이 요셉을 또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 아닌가!
그는 아기 예수가 탄생하기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다(마1:25). 짧은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하나님을 위해 참을 줄 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요셉의 의로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 세상에 펼쳐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의로운 사람의 행적이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 오늘도 그런 의로운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닐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