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문화’
미국에 처음 온 30여년전, 회사동료 모친의 장례식에 멋모르고 참석했던 필자는 간이 떨어질 만큼 쇼크를 받았다. 장례식 아닌 결혼식의 주인공인양 곱게 단장한 채 관속에 잠든 듯 누워있는 고인의 모습이 너무나 섬뜩했다. 눈을 번쩍 뜰 것 같았다.
장례만큼 한국과 미국의 문화가 현격하게 다른 분야는 없는 것 같다. 시신을 병풍 뒤에(요즘은 병원 영안실의 냉동고 안에) 숨겨두고 상주들이 곡을 하며 문상객을 맞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고인이 주역을 맡아 문상객을 직접 대한다. 유가족이 문상객들에게 일일이 음식을 대접하지도 않고, 문상객들이 밤새워 고스톱 판을 벌이지도 않는다.
미국인들은 장례를 ‘흉사’보다는 고인이 친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의식정도로 비교적 가볍게 생각한다. 따라서 시신을 될수록 생전 모습대로 보이게 하기 위해 배우들처럼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머리에 ‘파마’도 한다. 사고를 당해 깨진 얼굴은 왁스로 감쪽같이 땜질한다. 부패를 막기 위해 7시간에 걸쳐 혈관주사를 놓고, 부검당한 시신은 봉합수술도 한다. 이 모든 작업을 ‘임바머(embalmer, 방부처리사)’가 맡아 한다.
미국인들은 생시엔 언감생심이었던 호강을 죽은 뒤에 누린다. 평생 캐딜락을 못 타본 사람들도 죽은 뒤엔 시신이 캐딜락에 정중하게 실려 정복경찰 모터사이클 팀(실제로는 은퇴경찰이나 아르바이트하는 비번경찰관)의 호위를 받으며 장지에 도착한다. 관이 유가족을 태운 영구버스의 뒤꽁무니 좌석 밑바닥에 실려 푸대접받는 한국과는 딴판이다.
장례문화가 한국과 판이하지만 한인들은 미국식 장례를 타협이나 절충 없이 고스란히 수용한다.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LA, 뉴욕, 시카고 등지에 한인운영 장의사가 있지만 장례과정은 미국 장의사들과 다를 바 없다. 구태여 다른 점이 있다면 한인 장의사엔 당연히 조위금 접수대가 마련돼 있고 조화도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이다.
장례식만 판이한 게 아니다. 필자가 최근에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지만 ‘부고(訃告) 문화’도 한국과 미국은 판이하다. 본보를 비롯한 한국 신문의 부고는 천편일률적으로 “OOO씨가 XX년 XX월 XX일 향년 XX세로 별세(기독교인들은 ‘소천’)했다”는 고지문과 함께 장례일정, 유가족 명단, 연락전화번호 등을 나열한 후 둘레를 검은 테로 두른다.
시애틀타임스의 부고는 전혀 다르다. 크기는 한국신문 부고의 1/5 정도지만 고인의 가장 멋진 생시 사진(영정이 아님)과 함께 성장과정, 가족관계, 교육배경, 생전의 직업, 취미생활, 대인관계, 어록 등을 깨알같이 기록해 마치 간추린 자서전을 읽는 기분이다. 이런 부고로 꽉 찬 지면이 매일 한 페이지 이상 게재되고 일요일엔 2~3면씩이나 이어진다.
본보에도 모처럼 미국식 부고가 게재된 적이 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늦깎이(58세) 목사안수를 받고…”로 시작되는 송완규 목사님의 작년 11월 부고였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크스탄 등 옛 공산권 국가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송 목사의 활약상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지난달 말 게재된 최영임 권사님의 부고엔 영정도 들어 있었다.
장례식에 통상적으로 고인의 약력소개 순서가 있지만 미국식으로 신문부고를 내면 고인을 더 폭 넓게 소개할 수 있을 뿐더러 고인의 생애가 신문기록으로 남아 후손들도 자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장례문화만 아니라 부고문화도 미국식이 좋다는 생각이다. 솔직히 말하면 본보에도 이런 미국식 부고가 넘쳐흐를수록 광고수입에 도움이 된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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