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출신 인사들과 잦은 골프회동, 돈 씀씀이 커
1973년 4월, 뉴욕한인사회는 한때 한국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김형욱의 망명사건으로 화제가 만발했다. 그가 뉴욕으로 망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떠들썩할 만한 사건인데다 그가 모시던 박정희 대통령과의 한판 승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호기심 찬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1961년 발생한 5.16 군사 쿠데타에 현역 중령으로 참가한 인물이었다. 당시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쿠데타의 핵심세력 육사 8기 동기생들간 연락책을 맡았으며 쿠데타 직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한때 명목상 옹립됐던 장도영 대장을 반혁명 세력으로 몰아 퇴진시키는데 앞장서는 등 5.16의 공신 역할을 했다.
63년7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돼 3선개헌 공작 등 각종 정치공작을 주도하면서 5년 3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1969년10월 해임되면서 박대통령과 마찰을 빚었고 73년 3월 유신체체 하에서 국회 해산으로 의원직을 잃는 등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자 미국망명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그는 뉴욕의 한국식당과 술집에 자주 얼굴을 나타냈다. 지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스캔들도 뿌렸다. 돈 씀씀이가 큰데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공개석상에서 때리는 등 정보부장 시절의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자신이 고용한 변호사의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군 출신 인사들과 골프회동이 잦았고 돈을 많이 갖고 왔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비지니스를 하자고 부추기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실제로 그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샤핑센터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인단체의 기부요청 같은 것은 한마디로 거절할 만큼 관심이 없었다. 그가 박정권의 비리를 폭로했을 때 이를 비판한 한국 특파원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사건도 있었다. 그는 망명당시 재산이 15만 달러라고 주장했으나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가 조사한 결과 실제 1천5백만-2천만달러의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뉴저지 알파인의 호화주택에 살면서 자녀들에게 벤츠 승용차를 사주기도 했다.
한편 뉴욕으로 망명한 김형욱이 자신의 치부를 폭로할까 두려워 한 박정희 대통령은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 등 고위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내 그의 귀국을 여러 차례 종용했으나 허사였다. 항간에는 모국 대사자리를 제의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김형욱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77년 6월들어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도 박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대미공작 활동 등 박정권이 저지른 비리들을 폭로했다.
그와 같은 폭로전에 다급해진 박대통령은 김형욱과 동향으로 친밀했던 민병권 무임소장관을 대통령 특사로 미국에 파견해 회유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대책회의도 여러 차례 열었으나 별 효과가 없자 그를 겨냥해 ‘반국가 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김형욱이 박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 발간을 추진하자 박대통령은 이를 막기 위해 윤일균 당시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을 직접 보내 78년12월 50만달러를 주고 회고록 원고를 사들였다. 그러나 그 회고록이 79년4월 일본에서 출간되자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도박을 좋아한 김형욱은 79년10월1일 단신으로 파리로 갔다가 1주일후인 7일 저녁 파리 중심가의 한 도박장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실종됐다. 실종 전 파리주재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만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납치 살해됐을 개연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당시 박대통령 측에서 김형욱 회고록 출판을 저지하기 위해 회유, 설득, 협박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여의치 않자 그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됐으나 구체적인 살해경위에 대해서는 30년간 여러 가지 주장과 억측만 난무했다. 살해설 가운데에는 이상렬 주 프랑스 공사에 의해 납치된 그가 마취된 상태에서 대한항공 화물기로 서울로 보내져 청와대 지하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직접 처형됐다는 설도 있었고 파리에서 납치된 그가 박대통령의 지시로 서울근교 폐차장에서 차에 탄 채 압사했다는 설도 있었다. 파리 외곽 양계장에서 분쇄기로 자신이 직접 살해했다는 이모씨의 증언이 나와 한 방송이 현지 취재 결과 파리 북서쪽 4킬로 지점 보르고뉴라는 조그만 거리와 이정표를 발견했고 그곳서 4킬로 떨어진 지역에 양계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나 그 역시 설에 그쳤을 뿐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미국무부 비밀해제 문서에 드러난 기록을 보면 1980년 2월29일 미 국무부가 주한 미대사관에 보낸 주간동향 보고서에서 ‘김은 한인 남성 한명과 10월9일 파리를 떠나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행적이 묘연하다’고 밝힘으로서 제3국에서의 실종설을 제기했다. 김형욱의 납치 살해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가운데 가장 깊숙이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이상렬 전 주 프랑스 공사마저 지난 2006년 4월3일 지병으로 숨졌다. 그는 사건당시 프랑스 주재 중앙정보부 거점장으로 이 사건을 현지에서 총지휘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의혹의 주인공이 됐으나 그의 죽음으로 이사건의 전모 역시 함께 묻혀진 셈이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상렬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부터 김형욱 납치 살해 지시를 받은 뒤 이를 실행에 옮길 적임자로 중정 연수생 두 명을 선정했고 사건 1주일 전인 79년 10월1일 귀국, 김부장과 두 차례 면담한 자리에서 살해에 사용할 목적으로 소련제 소음권총과 독침을 건네받은 인물이었다. 이상렬은 진실위의 3차례에 걸친 면담조사에서 내 면담에는 ‘노’라고 기록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멕시코 공사를 거쳐 77년부터 프랑스 공사를 지낸 그는 사건 이후 귀국, 미얀마 대사, 리비아 대사, 이란대사 등을 역임했고 김형욱 실종사건의 열쇠를 손에 쥔 채 숨을 거뒀다.
미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대통령의 비리를 폭로한 김형욱
NJ알파인에 미망인 아들.딸 함께살아
2005년 잉글우드 브룩사이드 공동묘지에 묘 조성
현재 김형욱의 유족으로는 미망인 신영순(79)과 둘째아들, 딸등 세식구가 알파인에 함께 살고 있으며 장남 정한은 지난 2002년 지병인 간경화로 사망했다. 장남은 김형욱이 실종된지 1년후인 80년 제니퍼(경옥)와 결혼, 3남매를 두었다. 장남이 사망하자 맏며느리 일가족은 분가해 나와 살았으나 그들이 거주하던 알파인 소재 주택(54 처치 스트릿)에 대한 지분 반환소송에서 원고인 시어머니에게 패소해 현재는 뉴저지에서 시댁의 도움없이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유족은 지난 2005년 뉴저지 잉글우드 소재 브룩사이드 공동묘지에 김형욱의 묘를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로부터 3년전 사망한 장남 정한의 묘 앞에 세운 1미터 남짓 높이의 비석에는 ‘KIM’이란 성씨 밑에 ‘In loving Memory’라고 적혀있으며 ‘Hyung W. Jan 16, 1925 Oct. &, 1979’ 김형욱의 생년월일과 사망일자가 표시돼 있다. 사망일자는 그가 파리로 건너가 실종됐던 당일 날짜를 그대로 기록한 셈이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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