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뉴욕한인교회 중심 한승인.임순만 등에 의해 창설
함석헌.문동환 등 국내민주인사들 초청 강연회도 자주 열어
80년 광주사태이후 83년 김대중 뉴욕망명 계기로 본격투쟁
1960년대 후반 뉴욕에서 민주화 운동이 한국의 정치상황을 비판하면서 시발됐다. 국내에서 공화당에 의해 추진되던 박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던 인사들이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69년 8월15일 뉴욕한인회와 총영사관이 공동주최하는 광복절 기념식에서 시위계획을 세웠으나 정보가 새나가는 바람에 광복절 기념식 행사 자체가 연기되었다. 한인회 창설이후 한해도 거르지 않고 거행해오던 광복절 행사가 처음으로 취소된 것이었다. 그러나 최병철, 이응호, 박노식등 유학생 출신들은 시내 아메리카나 호텔에서 별도로 광복절 행사와 함께 3선개헌을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가졌다. 그해 9월14일 3선개헌안이 이효상 국회의장에 의해 변칙으로 통과되자 이들은 뉴욕민주한국시민연합이란 단체를 결성하고 한승인 위원장을 중심으로 박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편 70년대에 들어 임창영 전 유엔대사가 박정희 군사정권을 대놓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판은 전직 유엔대사라는 비중 때문에 미국여론에 잘 먹혀 들어갔다. 71년말 특별조치법이 통과되자 임 전 대사는 ‘국민의 소리’라는 뉴스레터를 한국어와 영어로 발간하면서 조국의 독재정치에 동포들의 항의와 참여를 촉구했다. 자비와 기부금등으로 운영되던 국민의 소리는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통일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 기조를 눈치 챘는지 73년 봄 북한으로 부터 초청이 왔다. 그러나 주위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를 미루다가 76년 7월 뉴욕주립대 교수 신분으로 유럽을 거쳐 북한을 1주일간 방문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학자의 입장에서 북한 쪽의 통일의지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민주화 의지는 통일운동으로 서서히 방향전환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때부터 그에게 친북인사라는 레이블이 붙었다.
이와는 별도로 72년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다가 75년6월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이 뉴욕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뉴욕한인들의 민주화 운동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목요기도회가 시작된 것이다. 당초 목요기도회는 한국에서 기독교 단체인 NCC에 의해 소집되다가 정치적 탄압으로 중단됐던 것인데 뉴욕에서 한승인 등 뜻을 같이한 인사들이 이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 한달에 한번 꼴로 모여 조국의 우려스러운 현실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창설 당시의 주역들은 한승인 장로를 비롯해 임순만, 이승만, 김윤철, 김홍준, 안중식, 유태영등이었고 구성원은 뉴욕한인교회와 관련된 인사들이 많았다. 기도회 장소는 115가 교회 지하실, 회원들은 한국에서 진행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보교환, 투옥당해 고생하는 민주인사들과 학생,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보낼 헌금 등을
모으는 일이었다. 강연회도 자주 열려 국내 민주인사들이 초청됐다.
함석헌, 김재준, 문동환, 이우정, 그레고리 헨더슨, 백기완, 김찬국 등이 초청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목요기도회는 반정부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정치적인 입장 표명이 늘어났다. 기도회 참석자들이 차차 불어나 최효섭, 김윤국, 김정순, 이윤구, 손명걸, 함성국, 박성모, 한성수, 김영철, 임병규, 김마태, 장한량, 한완상, 심재선, 민승연, 손홍민, 구춘희, 이진옥, 양우석, 송학린, 김영묵 등이 대부분 부부동반으로 참여했다. 79년 10.26 사태에 이어 80년 5월 광주사태가 발생하자 뉴욕한인교회, 미주민주국민연합, 재미한국인 민주정부수립촉진위원회 등 민주단체들이 광주사태에 대한 규탄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워싱턴으로 원정, 국무성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전두환 대통령이 유엔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들은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국내에서 민주인사로 탄압받던 문동환, 한완상, 이우정, 김찬국 등이 80년에 풀려나 뉴욕을 방문했고 83년에는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이
석방되어 뉴욕을 방문하자 그를 중심으로 민주화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이때 한승인이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환영준비위원장이 되어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주도했다. 워싱턴에 둥지를 튼 김대중이 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회를 갖는 등 미주 내 민주화 운동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와 같이 군사독재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거나 피신해 있던
인사들이 1986년을 기점으로 귀국하기 시작했고 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현되고 김대중에 대한 사면, 복권이 발표되면서 한국 내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진전이 있었다.
70년대 뉴욕에서 벌어진 박정희 정권 반대시위
뉴욕민주화 투쟁의 대부 한승인
초대 주불공사...61년 귀국명령 받고 뉴욕행
전두화 군사정부 반대시위에 삭발로 앞장
1926년 미국에 유학, 미주리대에서 학사, 1930년부터 33년까지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은 한승인은 뉴욕시절 3년간 하우스 워크와 행상을 통해 고학을 했다. 동양잡화와 중국차, 만년필, 향수 등을 할렘 부근 흑인지역을 무대로 팔았다. 뉴욕한인교회를 다니며 오천석, 정일형 등과 친하게 지냈던 그는 학업을 마치면서 33년에 귀국, 화신산업에 취직했고 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까지 되면서 해방을 맞았다.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군정청 상역국장을 지냈고 서울상대와 연회대학서 상업통론을 강의했다. 60년 4.19직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초대 주불공사로 임명됐다. 당시는 프랑스에 대사직 없던 때여서 직급은 공사였지만 대사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귀국명령이 떨어지고 정치활동이 금지되는 바람에 그는 뉴욕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때 가발도매회사를 운영하면서 자녀들의 학업을 도왔고 은퇴할 때까지 생계로 삼았다. 뉴욕한인교회 장로로서 7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목요기도회와 한민통 국민연합에 깊게 간여했고 김대중이 미국에 망명했을 때 환영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민족의 통일과 민주주의 국가선설이 실현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한국 민주화의 분수령이 되었던 6.29 선언이 있기 직전 전두환 군사정부 반대시위에 삭발로 앞장섰다. 83년 7월10일 스토니 브룩 포인트 수양관에서 열린 그의 80회 생일잔치에는 김대중 대통령후보, 김재준 목사를 비롯한 민주인사들, 뉴욕한인교회 교인, 친지 등 3백여명이 참석해 그의 일관된 민주화 운동을 치하했다.
이 무렵 그는 왕성한 저술활동도 아울러 폈다. 80년 미국 유학시절의 회고, 81년 뉴욕한인교회 60년사, 83년 탈출기 :동경진재 한인대학살, 84년 독재자 이승만, 황혼에 새벽을 기리다, 85년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86년 민주주의의 봄, 88년 내가 만난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등 폭넓은 주제의 단행본들이 잇따라 출간됐다. 이 시기 필자도 ‘아메리카 대륙의 한인풍운아들’이란 책을
쓰기 위해 컬럼비아대학 도서관 켄트홀을 자주 이용했는데 갈 때마다 거기서 한승인 장로를 만날 수 있었다. 길 건너 중국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면서 듣던 그의 경험담이 모두 그의 저서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원로로서 항상 겸손했고 나직했던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그는 1990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목요기도회서 강연하는 김재준 목사
삭발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한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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