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사냥
열흘 남짓 남은 올해 달력을 보다가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왜 1년은 하필 열두달이고 365일인가? 12월31일은 1월1일의 어제일 뿐이고 하루 상관에 추운 겨울이 뜨거운 여름으로 변하는 것도 아닌데 왜 해가 바뀌었다고 하는 건가?
옛날 원시사회처럼 달력이 없다면 어떨까? 해가 바뀌지 않으니 송년파티도, 신년하례도 없을 거다. 생일도, 환갑도, 제삿날도 없고 식당이나 비행기표도 예약할 수 없다. 젊어서 죽거나 늙어서 죽거나 모두 ‘향년 1세’이므로 공평한 면도 있다.
그러나 그건 부질없는 공상이다. 달력 없는 세상은 있을 수 없다. 달력이야말로 인류문명의 최고 걸작품 가운데 하나다. 달력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달력을 근거로 하루, 한 달, 한해의 계획을 세운다. 필자가 지금 허둥대며 글을 쓰는 것도 달력의 마감시한(금요일 아침)에 맞추기 위해서다. 여성의 생리주기도 한달이다. 달력은 곧 생활이다.
인류문명 발상지마다 엇비슷한 달력이 생겨났다. 지구의 공전주기를 근거로 1년, 열두달, 365일을 정했다. 로마황제 줄리어스 시저가 2000여년전 공포한 달력을 1582년 교황 그레고리 8세가 수정한 것이 현재 쓰이는 달력이다. 그러나 이 달력도 정확한 지구의 공전주기(365.2422…일)를 반영하지 못해 여전히 윤년제를 고수하고 있다.
요즘 달력은 벽에만 걸리지 않는다. 손목시계에도, 컴퓨터에도, 휴대전화에도 들어 있다. 책상머리나 자동차 대시보드에 부착하는 미니 캘린더도 있지만 지난 40여년간 누드 예술사진만을 고집하며 장식용 달력의 맥을 이어오는 ‘명품’ 피렐리 달력도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살았던 시골에선 달력이 매우 귀했다. 어느 집에나 한 장짜리 달력이 안방의 정중앙 벽을 장식했다. 대개 지역구 국회의원의 이름이 크게 찍힌 이 달력은 양력, 음력, 기념일, 공휴일 등이 깨알같이 적혀 있어, 좋게 말하면 일목요연했지만, 종이의 질이 워낙 나빠 연말쯤 되면 누더기가 되기 일쑤였고 색도 바래여서 흉물스러웠다.
경제가 나아지면서 12장짜리 호화 달력이 일반화됐다. 연말이면 사람마다 그림 좋은 달력 사냥에 나섰다. 특히 은행달력이 인기였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새해에 돈이 많이 생긴다는 속설 때문이다. 달력그림으로는 문 희, 남정임, 윤정희 등 당대 톱스타들의 사진이 상종가였는데, 배우들도 서로 달력의 첫 장인 1월에 실리려고 로비를 벌이곤 했다.
북한에선 지금도 한 장짜리 달력이 보편적이라는 소식이다. 경제사정이 워낙 나빠서 종이를 아끼려고 달력도 제한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주민들 사이엔 그림 좋은 12장짜리 달력이 뇌물로 통용될 정도란다. 70년대 초 한국처럼 톱스타(인민배우)들의 사진이 담긴 달력이 최고인기지만 일반 서민들이 이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이다.
그런데, 올해는 풍요로운 미국속의 한인사회에도 달력 품귀현상이 일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신문사에 외부 달력이 쇄도했지만 올해는 가뭄에 콩 나듯하다. 반대로 한국일보사가 만든 달력을 미리 부탁하는 사람이 예년보다 많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도 예년보다 줄어든 것 같다. 전후 두 번째라는 극심한 불경기가 실감난다.
필자는 지난해 최고로 멋진 달력을 아파트 벽에 걸어놓고 1년 내내 바라보며 싱글벙글했다. 명품 피렐리 달력이 아니었다. LA의 아들내외가 돌 지난 손녀의 사진들을 모아 컴퓨터로 제작한 달력이었다. 날짜와 요일뿐이지만 평생에 가장 많이 본 달력이었다.
내년달력은 연휴로 시작된다. 2010년 1월1일은 또 서기 1년 1월1일 이후 733,773일째 날이다. 독자 여러분께도 ‘럭키 7’이 3번 겹치는 행운의 2010년이 되기를 기원한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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