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안 계신 세상에도 어김없이 하루에 한 번씩 날이 저물었다. 초저녁이면 어둠이 홑이불처럼 덮이고 노란 금계국과 푸른 달개비, 실타래 자귀꽃같은 여름꽃들이 흔들리며 그 어둠 속으로 화해되어 들어갔다. 천지의 풍경은 그렇게 서로를 덮고, 서로를 끌어당기며 화해해 가는데 나는 저물녘의 구름 사이, 황혼으로 오시는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와의 이별과 화해할 수 없노라고 왈칵거리기만 했다.
몰핀으로도 달래지지 않을 통증만이 남아 있다는 아버지의 한시적 삶을 통보받았을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한없이 절망하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숱한 우리들의 시작을 위해, 그 열림을 위해, 우리들의 사소한 기쁨과 아픔에마저 무릎 꿇고 기도했지만 우리들은 고작 아버지의 마지막을 위해서만 기도했다. 통증을 제하여 달라고, 고통 없이 생을 마무리하게 해달라고 처음인 것처럼 간절히 기도했다.
중환자실에서 만난 아버지는 온몸에 아홉 개나 되는 의료기기를 꽂고 자는 듯 누워 계셨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맏딸이 올 거라는 소리에 손아귀에 미미한 반응을 보이셨다는데 아버지의 손은 나를 아는 체 하지 않으셨다. 언제나처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귓전에 틀어놓고 잠드셨다 깬 것처럼, “왔냐?” 하실 것 같은데, “고단하겄다. 쉬어라.” 하실 것 같은데 그리 하지 않으셨다. 라디오를 끄면 “나 안 잔다” 하시며 눈을 뜨시던 그때처럼 기척을 하실 것 같은데 그리 하지 않으셨다. 겨우 미미한 맥박과 가파른 호흡의 흔적이 기계에 남아 있을 뿐, 아버지는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가시고 계셨다.
중환자실 밖에 우두커니 앉아 정해진 면회시간을 기다리는 것, 그러다가 허적허적 집으로 돌아가는 것, 다시 날이 밝으면 강변북로를 따라 병원으로 달려가는 것, 차바람에 흔들리는 주홍 참나리꽃을 눈물로 어룽지며 바라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결국 아버지의 콩팥이 기능을 멈추었다. 기계들에 연결되어 있는 맥박과 혈압과 호흡의 수치가 불균형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담당의는 신장투석을 권했고 투석 시 혹시 일어날 수도 있는 거부반응을 대비해 심폐소생술까지 준비해야 한다며 다시 몸의 한곳에 의료관을 연결하려 했다.
우리는 조용히 거부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거두어 가시려는 아버지의 생명을 인간이 만든 차가운 의료기기에 의지해 연장시켜 보려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고 있기에 재차 다짐하는 의사 앞에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버지의 호흡이 얕아지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다. 가을 운동장에 호루라기 불며 청청하던 아버지의 호흡이 배에서 가슴으로 옮겨지며 점점 엷어져갔다. 푸른 칠판이 흔들리도록 분필글씨에 힘을 주던 아버지의 손목에서 맥박이 사라져갔다. 그 품에서 자란 다섯 자식들과, 그 배우자들과, 손주들의 뜨거운 눈물이 식어가는 아버지의 손등으로 떨어지고,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와의 볼맞춤을 하였다. 회초리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으시던,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의 볼은 아직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조용히 마지막 호흡을 내려 놓으셨다. 칠십칠 년, 평범하고 고달팠으며 또 가파르기도 했던 한 생애를 내려놓는 아버지의 표정은 평온했다.
삼일장의 마지막 날, 서울의 장례식장을 떠난 차량은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와 논둑 사이의 길을 밟아 장지인 고향마을에 닿았다. 아버지가 태어나고, 또 우리들이 태어난, 야트막한 산맥 사이에 별처럼 박혀 있는 고향마을이 눈 앞에 펼쳐지자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냈다. 때죽나무꽃이 하얗게 피던 냇물을 지나, 바람개비같은 아버지의 자전거가 지나던 미루나무 밑을 지나 고향집에 닿았다. 하지만 고향집은 무너져 헐리고 집터는 망초만 가득한 묵정밭이 되어 있었다.
그 옛집의 터에서 아버지는 하얀 꽃상여로 옮겨졌다. 아버지가 첫울음을 울고, 키를 자라고, 이웃의 끼니 걱정을 하며 인사 나누고, 대처로 공부하러 들락거리며 한달음에 달려오기도 했을 그 고향동네의 예를 따르기 위해서였다. 다시 차려진 빈소에서 시골 지인들의 마지막 인사를 받은 후 아버지를 태운 꽃상여는 동네사람들의 어깨에 들려 산으로 향해졌다.
상여는 하얀 개망초만 무성한 집터를 돌아 푸른 감톨 맺혀 있는 소롯길을 지나, 채마밭 사이를 밟고 갔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는 날을 알려주오. 못 가겠네 못 가겠네 서러워서 못가겠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진다더냐. 지난세월 돌아보니 꿈결같고 허무하네, 아가아가 큰 아가야 우지마라 다시 오마, 오소오소 다시 오소, 밥 떠놓고 기둘테니 언제든지 다시 오소….” 요령잽이의 선소리가 다시 한 번 우리들을 울렸다. 아버지와의 영원한 다음 생이 기약되어 있는 우리들이지만 구성진 상여꾼들의 상여소리는 잠시의 이별 앞에 우리들을 통곡하게 했다.
느린 박자로 구슬프던 상여소리가 저수지 둑길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빠른 두 박자로 바뀌었다. 내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따리를 빈집에 던져두고 내달리던 그 저수지 둑길을 아버지를 태운 꽃상여가 꿈결처럼 올라갔다. 둑길을 오르자 저수지를 품에 안은 선산이 나타났다. 선산의 나무들은 한여름의 햇빛 속에 엽록소를 토해내느라 비릿한 숲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할머니가 감자를 심던 비탈밭에도 개망초와 넝쿨식물만 가득했다. 하악거리며 저수지 둑길을 뛰어올라 감자밭에 하얗게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를 찾아내면 한없이 반갑기만 하던 그 밭머리에 상여가 놓여졌다. 할머니의 허리가 펴지길 기다리며 봉긋한 봉분 곁에 앉아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던 그 자리에 할아버지가 묻히고 할머니가 묻히고, 다시 아버지가 묻혔다.
칠월의 짱짱한 햇볕을 가려주려 안개같은 가랑비가 바람처럼 불어왔다 또 불어가기를 몇 차례, 아버지와의 마지막 작별예식이 끝이 나고 우리들은 산을 내려왔다. 어진 산등성이로 따스운 해가 뜨고 서늘한 대숲으로 순한 석양이 넘어가던 동네, 저녁밥 짓는 이내가 평화롭게 뒷산으로 올라가던 그 동네에 아버지를 남겨두고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우리들은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풍경은 흔들리며 젖었다. 젖으며 흔들렸다. 뜨거운 설렁탕 한 그릇을 앞에 두고도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화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의 이별을 안고 나는 다시 비행기를 탔다.
돌아온 타국의 하늘에도 석양이 지고 있다. 푸른 도라지 꽃몽우리를 퐁퐁 터트리며 놀던 그 여름, 뉘엿이 지는 석양 속을 달려오던 아버지의 자전거가 생각난다. 가지고 놀던 도라지꽃을 미련 없이 발치에 던져버리고 아버지의 자전거보다 더 빨리 집으로 내달리던 그 여름 저녁이 생각난다. 오늘도 석양은 다시 지는데, 그 석양을 밟고 달리던 아버지의 자전거는 다시 돌아올 줄 모르고, 가슴엔 터져버린 도라지꽃 같은 이별의 아픔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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