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9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홈커밍 댄스가 있다고 했다. 홈커밍 댄스는 홈커밍 풋볼 경기가 열리는 주말에 학교 카페테리아나 체육관에서 한다.
고등학교 때 미국에 온 필자는 홈커밍 댄스를 가본 적이 없다. 고교 시절의 가장 큰 추억거리가 되는 졸업 댄스파티인 프람에도 참여하질 않았다. 그 당시 같이 갈 파트너도 없었지만, 고등학생이 댄스파티를 간다는 자체가 필자에게는 아직 자연스럽게 와 닿을 만큼 미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9학년이었던 둘째가 세 살 위인 형도 안가는 댄스파티를 꼭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것도 파트너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사실 가지 말라고 막을 명분도 없고, 댄스파티도 안 보내주는 속 좁은 아버지라는 말도, 그래가지고 어떻게 교육위원이라고 할 수 있냐는 힐난을 들을 자신도 없기에 허락했다.
아직 운전을 못하는 나이여서 두 아이가 저녁식사 하는 곳까지, 식사 후 파티 장소까지, 그리고 파티가 다 끝난 후 파트너를 집으로 모셔 드리는(?) 일까지 모두가 전부 필자 몫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물어보니 상대는 단순한 댄스파티 동행 파트너가 아니라 여자 친구란다. 알고 보니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교회에 가 보았자 같이 있는 시간도 얼마 되지도 않고 다른 학교에 다니기에 평소에 만날 기회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여자 친구가 된다는 것인지 필자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3학년 마치기 전까지 여자 친구 한 번 사귀어 본 적 없던 순진했던(?) 필자의 과거에 비해 많이 앞서가는 둘째의 선진성에 놀라는 모습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둘째의 여자 친구는 아버지와 함께 필자의 집으로 왔다. 사진 몇 장을 집 앞 뜰에서 찍어준 후 둘째와 같이 차에 태워서 저녁식사 장소까지 달려갔다. 가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단, 예쁘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온 아름다운 모습의 여학생이 둘째를 좋아해 준다는 데에 대해 감사했다.
그런데 레스토랑 앞에 내린 둘째 녀석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무슨 전투를 앞둔 녀석처럼 심호흡을 크게 내쉬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둘째는 그때까지 혼자서나 혹은 누구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으로 레스토랑에 가본 적이 없었다. 평소 가족들과 갈 때 물론 계산은 필자가 하고 본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하나 정도만 얘기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자 친구와 가서는 전채부터 시작해 후식까지 다 본인이 주도적으로 정해야 하고, 팁까지 합쳐서 저녁 비용을 계산하고 나와야 하는데 내심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저녁 하나 같이 먹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 하면서 무슨 여자 친구를 사귄다고 하냐’고 하고 싶었던 말을 꿀꺽 삼켜 넘겼다.
그 홈커밍 댄스 후에도 두 아이는 교회 외에서는 만날 기회가 없었고, 그 해가 다 지나가기 전에 이성 친구 사이에서 다시 단순한 교회친구로 관계가 바뀌었다. 특별한 동기 없이 시작했던 둘의 특별한 관계가 특별한 사건 없이 보통 관계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의 세대 때와는 많이 다름을 느꼈다. 나 같았다면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관계 정리 후에는 다시 얼굴을 대한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은데 요즘 아이들은 다른 것 같았다. 필자와 문화적 차이인지 아니면 세대차이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 교회에서 오래 만에 두 녀석들이 대학서 방학이라 돌아와 다시 서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아주 반갑게 서로 안아주는 게 아닌가. 허참, 요새 애들은 이렇구나 하고 뒤쳐져 사는 필자의 현 위치를 자각하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요새 애들에게 이성교제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것은 고사하고 아이들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필자 스스로 전문가로부터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할 것 같다. 내가 알던 이성교제에 대한 시각을 갖고서는 이제는 화석으로만 남은 공룡이란 말을 들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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