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서 태어나 한국 거쳐 미국 정착한 이주연씨
이주연씨가 중국 전통 의상을 입고 자신이 그간 살아온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혈혈단신 아버지 찾아
한국 갔지만 찾지 못해
새 꿈 안고 미국생활
“저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 사람으로 자랐지만 제 반은 분명한 한국인입니다. 그래서 저의 반쪽 뿌리를 찾기 위해 혈혈단신 한국으로 건너갔고 이제 다시 새로운 꿈을 안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통신 서비스 업체인 NRC 미주법인 샌디에고 브랜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주연(47)씨는 중국 흑룡강 녕안시에서 태어난 중국인이다. 그렇지만 그의 뿌리의 한쪽인 아버지는 한국인이다. 자신의 한 뿌리는 아버지에 대해 이씨가 아는 것은 부친의 친구 분이 생부에 대한 소식을 전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 사람으로 녕안시에 있는 중학교에서 수학 교사를 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막연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던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녕안시에 있는 대형 백화점에서 근무하면서 개인 식당을 운영하는 등 미래의 백만장자를 꿈꾸며 정말 말 그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지난 95년 아버지 친구라는 분으로부터 아버지가 한국에서 모 대학 교수로 방송에 출연하는 등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 후부터 그녀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었다. “당시 아버지 친구 분한테서 제 생부가 한국에 계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제 마음 속에는 아버지를,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혈혈단신 한국으로 왔다. 그러나 쉽게 조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는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아니 생사조차도 모른다.
“아버지 소식을 접하고 그 이듬해 인 1996년 5월에 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동명이인 39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정말 그 누구도 제게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때부터 이씨는 정말 피눈물 나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식당 메뉴판에 적혀 있는 ‘곰탕’을 보면서 이 좁은 나라에 왠 곰이 많아 곰탕 요리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한국어에 서툴렀던 그녀는 돈 버는 일이라면 식당 주방, 때밀이에서 중국어 번역, 학원 강사까지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남편과 아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밤마다 울면서 저는 꼭 성공해서 지금 겪고 있는 이 아픔을 내 아들에게는 결코 물려주지 않겠다. 아빠에게 버림받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씨가 결심한 것이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지난 2003부터 시작한 그녀의 이웃 사랑 실천은 만두를 직접 빚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이씨의 만두 사랑 전하기는 허기를 채워주는 단순한 목적이 아니다.
‘저와 같이 마음에 상처를 안고 있는 분이나 또 다른 이유로 아픈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제가 마음을 다해 빚은 만두를 먹고 조금이나마 치유되기를 바라는 것이 제 간절한 바람입니다."
살아계신다면 올해 80이 되신다는 아버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이주연씨는 다시는 이 땅에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자신의 또 다른 꿈이다.
<이태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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