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만2년 전 1월에 ‘잘 살아보세’라는 글을 이 난에 쓴 기억이 난다. 지적,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靈)적으로 잘 균형 잡힌 삶이 잘 사는 삶이라는 생각을 칸트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빌어 글로 옮겨본 것 이었다.
무엇이든 철저히 의심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는 훈련을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지적,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인 균형을 생활 속에 어느 정도 이루고 유지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영적인 성숙에 도달하느냐 하는 문제는 이성으로 해결 할 수 없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일 것 이다.
논리학의 변증과 과학이 보여주는 실증 저 너머에 있다는 영(靈)적 세계는 보일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사하라 사막을 지나며 신기루를 본 경험이 있다.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으나 사진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거슬러 생각한다면 빈 공간뿐인 사진을 바라보며 신기루를 찾으려는 노력이, 바로 영적인 성숙을 추구하는 노력이 아닐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像)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證據)”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이 플라톤을 공부한 나에게는 개념으로 이해하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는 여전히 넘어서기 어려운 도전 이었다. 증거가 있어야 믿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증거란 논리적 일관성과 우리의 五官 (다섯 감각기관)으로 확인 된 것 들을 증거라고 하는 것 아닌가? 결국 논리의 일관성을 포기하거나 그 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은, 사실 나 자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흔히 부딪치는 어려움 이다.
천 길 벼랑에 매달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도와주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매달린 벼랑에서 손을 탁 놓아야 장부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오래 전에 읽은 백범 김구선생의 글에 “벼랑을 잡은 손을 탁 놓아라”는 구절에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송나라 사람 도천야보(道川冶父)의 시에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매달린 벼랑에서 손을 놓을 수 있어야 장부(得樹攀支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 이다. 합리적인 선택을 과감히 버릴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뜻 이다. 승려였던 그는 참선의 세계를 말한 것이리라.
몇 년 전, 아프리카에서 일하시는 선교사 한 분의 설교에서 나는 새로운 영적 세계를 맛보는 경험을 하였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다 주의 크신 은혜라는 깨달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삶은 죽기 위해 사는 삶입니다.” 항상 듣고 지냈으나 깨달음이 없었던 것 일까?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던 영적인 방황을 끝내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더 높은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벼랑을 잡은 손을 탁 놓아야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는 깨달음 이었다. 장렬하게 순교한 바울과 열 사도들의 삶과 죽음이 바로 필요하고도 충분한 증거라는 깨달음 이었다.
지식으로 추구하는 세계와 “지혜와 계시의 영”이 보여주는 세계가 얼마나 다른가 ‘잡은 손을 탁 놓아’야 보인다는 깨달음 이었다.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삶을 살기 위해 산다는 깨달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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