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를 보고도 모두가 침묵할 때 정의의 횃불을 들어 어둠을 밝히고 세상이 썩지 않도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성직자에게 부과된 지순한 사명이지만 실천적 삶을 통해 그 같은 사명을 다하는 성직자의 모습은 좀체 보기 어렵다.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듬고 떼강도와도 같은 불의한 독재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싸운 고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인물이 한국 천주교계를 대표한 것은 분명 시대의 축복이었다.
또 한 명의 추기경이 탄생했다. 정진석 추기경에 이어 염수정 대주교가 한국의 세 번째 추기경이 됐다. 다다익선이라 했던가. 하지만 많다고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니고 마냥 좋아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청주교구장 시절, 내란음모란 날조된 죄명을 뒤집어쓰고 청주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정치적 사형수의 봉성체를 기피하고, 불에 타죽은 용산참사 희생자 유족들의 눈에 고인 피눈물을 외면한 비정한 분들이 추기경이 된 것은 시대의 축복이 아니라 어쩌면 재앙일 수도 있으니까.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 1월14일 언론 인터뷰에서 관권 개입 선거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을 ‘거짓 예언자’라 부르고, 거짓 예언자의 ‘욕심’ 때문에 논란과 분열이 생긴다고 힐난했다. 그런 정 추기경의 눈엔 유신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한 지학순 주교도 ‘행동하는 양심’이 아니라 한낱 탐욕스런 사이비 예언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한편, 지난해 11월29일 천주교 대교구장 당시 “사제는 정치, 사회 문제에 직접 개입해선 안 된다”며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비판해 구설에 올랐던 염수정 추기경은 지난 20일 바티칸 교황청이 발행하는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민주주의가 들어섰는데도 천주교 사제단이 계속 집권세력과 맞서고 있다”는 질문에 “사제단 신부들의 주장이 ‘완전히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또 다시 파문이 일었다.
그러자 천주교 대교구가 “염 추기경은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대답했는데 번역 오류로 ‘비이성적’이라고 와전됐다”고 해명했지만, 비이성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 결국 오십보백보 아닌가.
문제는 염 추기경의 민주주의에 대한 편협한 인식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거늘 국정원 등 국가기관에 의해 과정의 정당성이 훼손된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이 합리적이란 말인가. 여론조작 댓글 등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불법 대선개입으로 민의가 왜곡되어 선거 결과가 바뀌었다면, 염 추기경은 사제단이 아니라 그렇게 당선됐으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는 대통령을 향해 비이성적이라거나 합리적이지 않다고 비판했어야 옳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는 “사제는 세상일에 무관심할 수 없으며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이를 고발하고 비판과 저항도 불사하는 게 예언자의 직무”라고 말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가슴에 품고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는 대신 정의롭지 못한 권력의 편을 드는 성직자들은 과연 어떤 예언자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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