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수천 ㎞의 황야를 걸어온 누(gnu) 떼가 물살이 거세 보이는 마라강 앞에 잠시 멈춘다. 건널 것인지 돌아설 것인지를 고민하는 순간, 한 마리의 누가 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수만마리의 누가 줄줄이 몸을 던져 강을 건넌다. 처절하다. 한 무리는 악어 밥이 되고 또 한 무리는 물살에 휩쓸려 수장된 후 떠올라 대머리독수리의 먹잇감이 된다. 간신히 강을 건넜어도 기력을 다한 상당수의 누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오래 전에 방송됐을 법한 ‘동물의 왕국’을 유튜브로 다시 봤다. 평소에도 즐겨보지 않는 프로그램을 일부러 찾아본 것은 임종룡 금융위원장 덕분이다. 그는 지난 16일 취임식에서 “금융개혁은 국민이 주신 소명이기에 아프리카의 들소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금융개혁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비유한 아프리카 들소, 누는 초식동물이다. 300여만마리의 누 떼가 초원을 찾아 1년에 한 번씩 케냐 마사이마라와 탄자니아 세렝게티 사이 약 3,000㎞를 왕복한다. 그 대이동의 큰 고비 중 하나가 두 나라 국경에 있는 마라강인 것이다.
임 위원장이 금융개혁의 길을 누의 대이동으로 설명했다는 것은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예견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금융인의 입장에서는 가장 간절할 수 있는 ‘감독 쇄신’과 ‘규제 개혁’부터가 그렇다.
금융당국은 언제나 개혁과 쇄신을 약속했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2008년 대통령 업무보고서에서 “금융규제 완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비명시적 규제에 대한 정비를 최우선적으로 하겠다”고 강조했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역설했던 김석동 금융위원장 시절에도 금융감독 개혁을 위한 논의가 있었다. 2011년 5월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금융감독 혁신 민관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된 것. 부산 저축은행 사태로 금융감독 당국의 불신이 커지자 대통령이 직접 지시해 만들어졌다. 금융감독 시스템 전반을 뜯어고친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첫 발을 내디뎠지만 TF는 두어달 만에 ‘감독권한 분산’ 등 핵심 의제를 차기 정부로 넘기고 활동을 접었다.
태스크포스는 신재윤 금융위원장 때도 등장했다. 그는 2013년 취임과 동시에 4대 핵심과제를 발표하고 각 과제들에 대한 TF를 꾸렸다. 핵심과제 중에 ‘금융감독 체계 개편’이 어김없이 포함됐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수개월 간의 작업 끝에 발표된 개편안은 금융소비자 보호처를 그대로 금융감독원 산하에 두는 등 기존 체제와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금융위원회가 더 많은 제재권을 가져가는 방안이 포함돼 금융권은 물론 대통령에게도 쓴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신 위원장은 이후에도 “’보이지 않는 규제’까지 모두 걷어내 금융업계의 경쟁을 촉진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개혁의 고삐를 죄기 위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임 위원장이 취임했다. 금융권이 그에게 거는 기대감의 무게는 예전과 사뭇 다르다. 길지는 않았지만 민간 영역에서의 경험이 힘 있는 금융개혁의 원천이 될 것이라 믿는 눈치다. “금융당국은 일일이 지시하는 ‘코치’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심판’으로 역할을 바꾸겠다”는 일성에는 힘찬 박수까지 보내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된 금융개혁을 응원하면서도 가슴 한편의 우려가 가시지 않는 것은 어쩌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포진해 있는 2,000여명의 ‘코치’ 때문인지 모른다. 평생을 코치로 뛰어온 그들이 수장의 주문대로 검은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호루라기만 불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얘기다. 과거부터 수차례 있었던 금융위원장의 금융개혁 선언과 TF가 무위로 끝난 것 역시 그들이 ‘전직’에 실패했거나 애초부터 그럴 의사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마라강을 건넌 누 떼는 세렝게티의 평온한 초원에 도착해 번식을 시작한다. “대이동 중 수십만마리의 누가 희생되지만 이때 50여만마리가 다시 태어나 침입자에 대항할 다수의 힘을 얻는다”고 내레이터는 전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갓 태어난 새끼라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누는 버려진다. 다시 시작될 대이동에 짐이 되기 때문이다. 임 위원장도 이 마지막 장면까지 감상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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