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을 떠나 온 2000년의 한국은 전통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것이 쇠퇴하는 추세였다. 나는 한국에서 한국복식사를 공부했고 대학에서 가르쳤다. 모교에서 박사 논문을 지도해 주신 지도교수님께서 같은 해에 퇴임하셨는데 그 이후로 후임을 뽑지 않아 한국복식사 연구실에 남아 있던 후배 10여명이 뿔뿔이 흩어졌다. 국립대학인 서울대학이 한복 연구 교수를 뽑지 않으니 곧 지방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 점차 전공자 수가 줄어갔다.
내 전공이라서가 아니라 한복은 이천 년을 넘게 지속되어 온 한국 민족의 문화이고 자산인데, 대학에서 연구의 명맥이 끊어진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본격적인 한국복식사의 연구는 해방 이후에 시작되었다. 학문 연구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제대로 정립하기 위한 할 일이 많은 분야이다.
그러한 현실을 잘 아는 나는 미국에 살기 때문에 한국에서 내가 몸담았던 연구와 교육의 장에 기여할 수 없는 현실이 괴로웠다. 그때 한국고전번역원의 웹페이지에서 조경구 선생님이 해설하여 소개한 고려시대 문장가 임춘(林椿) 선생의 글을 만났다. “진실로 숨어 살 수 있는 자가 능히 드러낼 수 있고, 진실로 드러낸 자가 능히 숨어 살 수 있다. (眞隱者能顯也眞顯者能隱也)” 임춘(林椿), 일재기(逸齋記) <서하(西河)선생집>.
조경구 선생님은 이 구절의 의미를 “조용히 은거하면서 역량을 기르고 있다가 때가 이르면 세상에 나아가 그 역량을 발휘하고 여의치 않으면 다시 조용히 물러난다”는 “이상적인 진퇴”의 처세로 설명하셨다.
임춘 선생의 글을 만난 후 나는 내 미국 생활을 진실로 숨어 살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시간이 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크게 프린트하여 책상 앞 벽에 붙여놓고 때때로 보며 마음을 다졌다. ‘오늘도 역량을 길러 준비된 사람이 되겠노라고. 드러낼 때가 언제 오든…’그렇게 12년이 흐른 뒤 운명처럼 나는 미국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LA 게티미술관에 소장된 루벤스의 ‘한복입은 남자’가 특별전에 전시되면서 한복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이 기획되었고, 나는 한복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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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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