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그때를 아십니까
▶ 한국 연예인 워싱턴 위문공연

왼쪽부터 백설희, 김희갑, 이미자, 곽규석.
“아메리카 타국 땅에 차이나 거리/ 란탄 등불 밤은 깊어/ 바람에 깜박깜박~”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것 같은 백설희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객석은 넋이 나간 듯했다. 황금심이 무대에 등장했다. 심금을 울리는 아련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한인들은 ‘알뜰한 당신’을 나직이 따라 부르며 모국에서의 지난 청춘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 건국 200주년 기념공연
1976년 6월 초여름, 워싱턴에서는 모처럼 한국 인기 연예인들의 공연이 열렸다. 미 건국 2백주년 기념 재미교포 위문공연단의 무대였다. 백설희, 황금심, 김정구, 고운봉, 신 카나리아, 이은관 등 50년대를 주름잡았던 인기가수들로 구성된 위문단은 워싱턴을 비롯한 10개 도시를 돌며 교포들을 ‘위문’했다.
지금은 ‘재미교포 위문공연’이 사라졌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인기 연예인들의 해외공연은 한인들에게 특별한 문화행사였다. 1960, 70년대 조국을 등지고 태평양을 건넌 한인 이민자들에게 연예인 공연은 모국에의 향수를 달래주고 문화적 갈증도 해소해주는 이벤트였다.
1960년대 유학차 도미한 박규훈 전 워싱턴한인회장은 “70년대와 80년대만 해도 한국 인기 연예인 공연이 2-3년에 한 번꼴로 심심찮게 열린 것 같다”며 “한국 연예인 공연을 가면 반갑고 옛 추억이 생각나 가슴 먹먹하기도 한 시간이었다”고 되돌아봤다.
이미자와 곽규석
연예인 위문공연이 워싱턴에서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한국에서 이민이 본격화된 1970년 이후라는 게 올드 타이머들의 증언이다.
기록상으로 첫 공연의 주인공은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였다. 1970년 이미자는 워싱턴 한국방송의 초청으로 공연을 해 갓 이민 온 한인들의 마음을 적셨다.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이미자는 당시 스캔들 와중에 있어 해외 공연을 ‘도피성’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이미자는 77년 4월에는 원맨쇼의 1인자 남보원과 토마스 제퍼슨 고교에서 공연을 하고 5월2일 볼티모어에서도 무대를 가졌다. 70년대 최고의 MC, 후라이보이 곽규석도 1971년 워싱턴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교포 위문공연을 가졌다.
귀국 후 그는 “교포들이 모두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대해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메가톤급 폭소를 안겨주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냉전의 그림자
70년대의 일부 공연에는 시대상을 반영하듯 냉전의 더께가 더덕더덕 묻어나기도 했다. 76년 미 건국 200주년 기념 공연에 나선 연예인들은 출국 전에 “이번 공연에서 해외교포들에게 북괴의 허위선전을 폭로하겠다”고 밝혔다. 당국의 은밀한 ‘오더’가 있었음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 나들이는 아주 특별한 특혜였다. 정보 당국의 눈에 벗어나면 비행기를 탈 수가 없음은 불문가지다.
당시 워싱턴에 온 신 카나리아는 “옛날 청춘좌(현 중앙극장)에서 명성을 날리던 배우 김호자와 영화배우 김지애, 아나운서 이광재 등을 워싱턴에서 만났다”면서 미국으로 이주한 동료 연예인들을 만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1979년 케네디 센터에서 열린 공연에는 이미자, 최희준 등 최고의 스타들이 출연해 입장권 구하기 전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인 1981년 1월에는 대규모 재미교포 위문공연단이 워싱턴을 찾았다. 정부가 파견하는 매머드급 공연단이었다. 반 전두환 정권 분위기가 강한 해외교포들을 달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위문공연’이었다. 허규 극단 민예 대표를 단장으로 인간문화재 박동진, 최고의 인기가수 조용필, 박경희, 코미디언 김희갑, 곽규석과 KBS 김강섭 악단 멤버 등 29명으로 위문단은 구성됐다. 이들은 1부는 창극, 2부는 가요와 코미디로 워싱턴 한인들을 웃기고 울렸다.
80년대 대규모 공연
86년에도 대규모 재미교포 위문공연단이 꾸려졌다. 가수 구창모, 김수철, 심수봉, 이선희, 최진희 등 톱 클래스 가수들과 개그맨 이용식, 밴드 영웅시대 등 정상급 연예인들은 3월22일 워싱턴에서 첫 공연을 하며 13개 도시를 순회했다.
공연을 앞두고 가수 구창모는 “해외공연이 처음인데다가 교포 위문공연이어서 국내무대보다 신경이 훨씬 더 쓰여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은 몰론 요즘은 밤잠을 제대로 못잔다”며 각오를 다졌다.
이듬해인 87년에도 코미디언 김희갑, 김병조, 심형래, 김학래, 가수 이광조, 김학래, 정수라, 김완선, 그룹 비상구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참가한 공연단이 구성돼 4월 워싱턴에서 노래와 웃음을 선사했다. 이들은 미국 10개 도시를 순회했다.
89년 5월에는 가수 전영록이 대한항공의 협조 아래 세계 순회공연의 일환으로 워싱턴에서 다른 연예인들과 공연을 갖기도 했다.
연예인들도 위문공연 선호
1970년에 이민 온 이정춘 씨(75, VA)는 “요즘처럼 한국 방송이나 소식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당시에 모국 연예인들의 공연은 향수와 갈증을 달래주는 청량제 같은 역할을 했다”며 “당시만 해도 외국 방문이 어렵던 시절이라 연예인들에도 미국 바람이 불어 위문공연을 서로 오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대규모 연예인 위문공연은 90년대 들어 점차 그 열기가 식어가다 2000년대 와서는 그냥 공연 성격으로 변모했다. 위성 TV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일상적으로 한국 연예인들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아련했던 ‘위문 공연’ 시대가 저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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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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