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모 박사소아내분비 전문의
하와이 한인들의 영원한 주치의, 동서의학 교류에 주력
대를 이어 인술 펼치며 신앙인으로 간증도 활발
의사가 부족하다는 하와이, 한국말로 소통하는 의사가 턱없이 부족했던 1970년대 초반부터 하와이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주치의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서세모 박사(87). 미주 한인이민 종가 하와이에 1960년대 후반부터 제3의 이민물결을 타고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들에게 서세모 박사의 인술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 박사의 인술은 대를 이어 그의 장남 서필립 박사에게 이어져 부자가 나란히 '서세모 서필립 클리닉'을 운영하며 주민들의 생로병사와 함께하고 있다.
서 박사는 하와이는 물론 한국과 미국내 소아내분비학 전문의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인으로, 동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인사회 발전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부산 동래가 고향인 서 박사는 1972년 토론토대학에서 생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하와이로 이주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내 의료신문 보도에 의하면 서 박사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세브란스의과대학에 입학,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스웨덴병원 임상병리실에서 조수로 근무하면서, 임상의학의 기반으로서의 임상병리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1955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수련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펜실베니아주 Erie의 Harnot Medical Center에서 20개월 동안 병리학과 레지던트로 수련을 받았다. 그 후 보스턴 어린이병원에서 소아과 레지던트과정을 2년, 하버드 의과대학 소아내분비 펠로우십 2년 반을 수료하였다. 1963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학교실 조교수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1963∼1966년 서 박사는 대한소아과학회의 학술부장으로 학회지 발간과 매년 전국소아과학회 개최, 서울시 월례회 등을 통해 학회의 질적 향상에도 기여하였고, 당시 미개발 분야였던 소아내분비학의 보급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대한 소아과학회 학술상을 받았다.
1966년 다시 캐나다대학 토론토 어린이병원 연구소로 옮겨가서 칼슘대사 비타민 D분야의 대가인 도날드 프레이져 문하에서 선임연구원으로서 3년 동안 칼슘과 마그네슘대사와 관계되는 각종 호르몬들과의 상관관계 연구에 몰두하여 1972년에는 토론토대학에서 생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하와이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슈라이너 어린이병원에서 골미네랄연구실험실을 설치하여 계속해서 칼슘, 마그네슘대사와 관련된 호르몬들의 임상적 적용과 각종 골대사 질환에 대한 병인 구명과 치료 및 연구했다.
서박사는 하와이가 태평양에서 동서양 의학의 교량역할을 하기에 지리적으로 적합하다 생각하여, 동서양 의학 교류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1972∼1973년에는 하와이대학 대학원교육과정 컨설턴트로 일본 오키나와에 파견되어 미국식 임상의학을 일본의학도들에게 전수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당시 한국 의사로는 처음으로 일본소아과학회 총회에서 신생아 칼슘, 마그네슘 대사 기조강연을 하였고, 일본골대사학회에서 칼슘과 마그네슘의 상관관계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1970년대 일본에서 새로 발생한 가와사끼 병에도 관심을 가져 가와사끼 선생을 직접 하와이로 초청하여, 하와이가 미국에서 가와사끼 병을 임상연구하는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가와사끼 병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데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슈라이너 병원 재직 중에는 한국의 많은 신체장애아들을 위해 당시 의료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무의촌지역(강원도, 전라도, 제주도 등)을 직접 방문하여, 이 아이들을 하와이로 데려와 수술치료를 받게 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 박사는 지난 2011년 부인과 함께한 31일간의 동남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쓰러져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 이 사건 이후 서 박사는 덤으로 사는 인생을 살며 적극적인 간증활동을 하고 있다. 2011년 서 박사가 공항에서 퀸스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던 당시 상황은 뇌졸증으로 시신경을 상해 시력을 잃었고 신장이 마비되어 투석을 해야 하는데 심장 때문에 못하는 상황이었다. 뒤이어 간과 췌장이 마비되었다. 극심한 탈수와 빈혈에 협압이 220/150, 혈당이 850이나 되어 퀸스병원의 쟁쟁한 의료진 모두가 체념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 박사는 당시 부활절 새벽, 천사의 얼굴과 붉은 색 문에 검은 붓글씨로 쓰여진 신궁(神宮)을 본 이후 소생불능이었던 건강상태가 의사인 자신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는 것을 체험했다. 서 박사는 곳곳에서 당시의 체험을 간증하며 우리들의 삶의 매무새를 바로 잡는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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