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하고 시작되는 아들의 대학 입학을 위한 에세이의 첫 문구를 보고 내가 한 말은 “이 미국 땅에 수십만 명의 이민자가 있는데 그들이 한 번쯤은 사용했을 문구라서 입학 사정관이 전혀 읽어 보지도 않을 것 같다”였다. 좀 더 자신을 특별하게 보일 만한 주제로 바꿔보라고 했다.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아이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게 ESSAY 아니냐, 왜 남에게 잘 보이는 억지 글을 쓰게 하냐며 고집대로 글을 썼고, 많은 요인이 있었겠지만 결국 원하던 곳은 합격하지 못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던 아이는 인근 커뮤니티 컬리지를 거쳐 결국은 원하던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지금은 아주 만족하고 있다. 이민자라면 누구나 떠올렸을 이 말과 함께 창피하기도 했던 웃지 못할 추억들을 기억하며 혼자 얼마나 웃었던지... 23년 전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들어간, 생전 살아본 적 없는 허름한 아파트를 보며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는 하루도 채 안 걸렸다. “헐!”
영문학을 가르치시는 아버지 덕에 영어를 꽤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세이프웨이(Safeway)에서 미국 돈 계산이 안 되어 집에서 가져간 동전을 우르르 꺼내 놓고 “You can take as you want!”하고 말하며 깨달았다. 학부모 봉사 의무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가야 했던 큰아들의 사립 중학교가 왜 그리 싫던지. 눈과 귀가 다 막혀 매일 한국 돌아갈 궁리만 했다. 가는 곳마다 "Pardon me?", “Please give me slow speaking”을 달고 다닌 내게 늘 또박또박 말해주던 큰아이의 담임 선생님 Mrs. Anderson은 잊을 수 없는 분이었다. 남편의 식당에 찾아온 백인 손님이 “Do you have any Fried Rice?”하고 물었을 때 'Thank you'가 입에 붙은 나는 “NO, THANK YOU”라고 답했고, 손님이 비웃음을 지으며 ”NO, THANK YOU?"라고 되물었을 때 잘못 말한 것이 너무나 창피해서 한 달 내내 '입에 배어서 그런거지 잘못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너는 영어밖에 못하지만 나는 그래도 한국말도 영어도 다 할 수 있지 않냐'고 스스로를 얼마나 위로했던지…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더 이상 언어적으로 불편함이 없는 미국은 이제 타향이 아닌 고향이 되어 버렸지만, 서류를 작성할 때면 나의 First Language는 아직도 한국어다. 나의 메디케어 고객분들의 한국에서의 의료건강 관리를 도와드리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이유는, 나로 하여금 영원히 바뀌지 않는 뿌리가 '한국인'인 것을 잊지 않게 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숙희(메디케어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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