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3번째 토요일! 우리들이 만나는 날이다. 나는 단체 카톡방에다 3번째 토요일인 2월 14일 11시 30분에, 모이는 장소와 그날 공동 읽을거리를 올려놓았다. 그러자 바로 “2월 14일은 3번째가 아니고 2번째 토요일이라, 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요.” 라는 회원님의 카톡이 올라왔다. 우리 모임이 40년 가까이 매월 3번째 토요일에 모였었는데! 난 내 부끄러운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웃느라 배꼽 빠질 뻔~~<...”했다는 말과, “저도 자주 실수해요” 라는 회원님의 카톡에, 3번째 토요일인 21일로 정정할 수 있었다.
기억력의 착각은 더 이상 젊은 날의 향수나 후회의 문이 아니라, 삶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점점 많은 것을 잊게 된다. “잊기는 했어도, 잃어버린 것이 아니기에 다만 깊어졌을 뿐이다”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여기서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르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오른다. 이 작품은 3세대를 걸쳐 이야기가 계속된다. 주인공 마르셀이 사랑과 예술, 사교계 등 일상생활을 경험하면서, 진정한 자아와 자신의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을 쓴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마르셀은 마들랜을 차에 적혀 한 입 베어 물며, 잊혔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밀려오면서 어린 시절을 불러냈다. 그 기억은 떠올리려고 애써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 맛과 향이라는 감각의 문을 통해서 갑자기 전부가 되살아난 것이다. 소설에선 마들랜 한 조각으로 잊었던 시간을 불러왔지만, 현실의 우리는 냉장고 속의 맛있는 과일을 보면서도 불쑥 되살리기도 한다. 기억은 논리보다 당장의 감정에 더 충실하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위대한 인상주의자인 프르스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억과 환상과 심미적 체험 속에서만, 인생이 비로소 뜻 깊은 현실로 된다는 것이다.
그 체험을 가장 강력하게 실감하는 것은, 현실 가운데서 인간과 사물과 마주칠 때가 아니고, 예술 작품을 창조하거나 감상할 때, 또는 삶의 행위자가 아니고 관찰자일 때, 또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되찾을 때, 즉 예전의 느낌을 기억을 통해서 느낄 때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일상에서 지나칠 뿐이다. 예술은 잃어버린 시간을 붙잡아 두기에, 시간은 달력 속 시간이 아니라, 이처럼 감각 속에 잠들어 있다가 문득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각자의 마들랜이 있다. 그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문득 코끝을 스치는 냄새 하나, 햇빛 한 조각, 멀리 흐르는 구름 속에 녹아있는 우리 감각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잃어버린 시간은 기억을 하므로 우리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나를 실감할 수 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되풀이되지 않는 <순간의 일회성>이 기억으로 되살려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며, 또 무엇인가를 비로소 조용히 이해하게 된다.
<
김인자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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