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혹은 이민자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가슴이 싸아해진다.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어쩌면 ‘이민’이라는 단어 속에 이별을 포함하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면역되지 않는 이별의 아픔을 감내하며 이 낯선 땅을 선택했다. 모든 것이 익숙한 그 품을 떠나오던 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더 잘 살아보겠다는 미래에 대한 열망 혹은 자식 교육 제대로 시켜보겠다는 의욕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살다보면 초심은 세월의 횡포 앞에 무기력해지기 일쑤다.
새로운 식문화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아침 밥상을 걷어치우고 토스트와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대신하며 법석을 떨었던 기억. 그런데 정작 낯선 생활권에 접어들고 보니 갑자기 뻑뻑한 빵이 지겨워지고 버터 냄새가 니글거려 매일 김치를 먹어야 속이 개운해지는 생뚱맞은 심보는 어디서 찾아든 걸까?
제법 엘리트에 속했던 나의 모습은 어디에 있나? 머리 속에는 광활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데 그것을 대변해야 할 혀는 오리무중에 빠져 있다. 어쩌다가 내뱉은 어설픈 한마디는 쉑쉑 쉰 소리를 내며 혀끝을 빠져나가버린다. 행여 동료들이 그런 자신을 눈짓으로라도 비하하면 이가 덜거덕거리고 발가락에 있던 피까지 솟구쳐 올라오지만 차돌같이 단단한 주먹을 슬그머니 풀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자식들 때문에 내가 참는다.’
그런 희생 속에서 키우는 자식은 부모의 비틀거리는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여름에 오이 자라 듯 쑥쑥 잘도 커 간다. 친구들과 매끄러운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다 후련할 정도다. 그런 자식의 모습이 대견하고 장하다는 생각에 정말 이 땅에 잘 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뿌듯한 보람 속에 이민이란 항해를 만끽하고 있던 어느 날 배가 문화와 언어란 암초에 충돌하고 만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노란 머리통 하나가 눈앞에서 얼쩡거린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자식놈이다! 얼마 전에는 무스와 헤어스프레이를 사용해 벼락 맞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니더니만 이제는 노랑 머리로 둔갑한 것이다! 다른 집 자식들이 오만가지 컬러로 머리에 물을 들이고, 두 세 개의 귀걸이를 하고 바지를 엉덩이에 걸치고 다니는 모습에 얼마나 혀를 끌끌 찼던가. 어디 그뿐이랴. 어른을 보고 입으로만 “안녕하세요” 하거나, 어른이 묻는 말에 어깨만 으쓱하고 마는 행동을 보고 한국식 예의범절에 대해 또 얼마나 역설을 했던가.
그 역설은 곧 나를 향한 역설이 아니었나 싶다. 갑자기 허탈해지기 시작한다. 안주시킬 수 있는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온 자신의 희생이 안타깝고 서러워 결국 울화통이 터져버린다. “이 놈의 자식! 내가 누굴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하고 야단을 치면, “누가 그렇게 맨 날 일만 하라고 했어요? 아빠 엄마도 제발 놀아가면서 하세요”라는 기막힌 메아리가 돌아온다.
상실감이 밀려온다. 부모와는 단 5분도 대화를 하려들지 않는 자식이 친구와는 몇 시간씩 휴대폰을 붙들고 낄낄댄다. 전화 명세서에 쌓여 있는 수백 통의 텍스트 메시지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만다. 인생 교육을 시키려들다가 울화통이 치밀어 버벅거리고 만다. 몇 마디 떠들고 나면 영어가 바닥이 나버리기 때문이다. 이중 문화와 언어의 장벽은 더 이상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사사건건 자식과 부딪치는 일에 대해 남들 앞에서 이제 입도 뻥긋 못한다. 자식 잘 키워서 어째 보겠다는 마음도 없어진 지 오래다. 그런 자식이 대학을 가면서 이제야 독립을 하게 되었다고 즐거워한다. 매일 휴대폰을 열어봐도 불통이거나 남겨진 메시지는 없다. 어쩌다 휴대폰이 울려 들뜬 마음으로 받으면 달랑 뭐 좀 보내달라는 소리뿐이다.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신호음이 뚜~우~ 하고 울리다가 삑삑거린다. ‘자식은 키워 놔 봐야 다 소용없다’는 어머니의 탄식이 삑삑거리는 소리를 타고 울려 온다. 그러고 보니 너무나 오랫동안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지 못한 것 같다. 불통이 될지라도 남기고 싶어 긴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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