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 민족이든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면 그것은 불연속적이고, 협소하며, 지역적이다. 정체성의 본질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고인 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로 용기의 모양에 따라 변천해왔다.

그래서 하나의 민족을 통틀어 대표하는 정체성을 정의하려는 작업은 험난한 벽을 만난다. 한국의 전통음식 김치를 예로 들어, 지역과 시대에 따라 양념부터 숙성하는 방법까지 모두가 제각각이라 전체를 통틀어 “한국 김치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타고 난 생리적인 성과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성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하는 세상이다. 즉, 선택의 세상이다. 어떤 차를 타고,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음악을 듣는 가 등 선택에 따라 개인의 정체가 정해지는 시대다.

우리의 2세들은 인터넷 채팅 룸에서 여러 개 ID를 이용하여 수시로 아바타 모습을 바꾸어가며 6~7명과 한꺼번에 대화한다. 헬스클럽에 가입하거나, 약관에 동의하고 각자의 참여도에 따라 등업 신청을 하는 회원제 웹사이트에 사인업하는 것처럼 선택을 통한 자발적 참여에 그들은 익숙하다.

그들에게 정체성의 본질은 없다. 오직 존재적 선택만 있을 뿐이다. 옷을 갈아입듯 순식간에 자신의 정체를 변경하는데 능숙한 청소년들에게 한가지 고정된 정체성 유지를 강요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한 예로, 정체성 유지를 위해 한국어 교육을 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 로 등을 떠밀기보다 “언어학자 촘스키는 8세까지는 4~5개국 언어를 섭렵할 수 있고 16세 까지는 1~2개국 언어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너는 그런 능력이 있기에 한국어를 포함한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무엇이든 원하는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고 격려하는 것이 선택권 침해를 피하고 자발적 선택을 유도하는 길이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비슷한 정서를 지닌 사람들이 만나면 좀 더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 개인의 정체성을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공용어 혹은 정서가 아니라 ‘선택’의 여지다.

우리의 자녀를 민족 정체성 팻말인 ‘전통성’ 함유량으로 평가하고 그에 예속시키려는 노력은 어찌 보면 그들 각자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무시하는 일이다. 고정된 한국인 정체성을 빌미로 민족 역사의 권위나 전통의 계승을 앞세워 억지로 정체성 교육을 강요하는 것은 반발심을 불러오거나, 왜곡된 민족주의로 빠지게 한다.

나아가 정체성 강조는 전체화, 절대화, 획일화의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고, 뿌리와 전통을 핑계 삼은 무분별한 정체성 교육은 전면적 감시체제로 돌변할 수 있다.

글로벌 시민으로 성숙해야 하는 이 시대에 정체성으로 버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자칫 인어공주의 비극을 반복할 수 있다.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인어는 자신의 모습과 배경에 한계를 느껴,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려고 바다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주고 인간의 다리를 얻는다.

인간 정체성의 심볼인 다리만 얻으면 인간이 사는 땅에서 왕자의 사랑을 얻을 것이라고 꿈꾸지만 의사소통에 실패하여 결국 왕자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하는 비극을 맞는다.

진정한 정체성 확립은, 바다에 속한 존재가 다리를 얻었다 한들 땅에 속한 존재와 서로의 공간을 넘나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각자의 처한 환경에서 자신의 실존적 존재가치를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