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 좀 보세요. 우리 마당에 사는 토끼예요. 예쁘죠?” 란씨가 스마트폰을 같이 걷는 아줌마들의 코앞에 내민다. “어머, 예쁘네, 진짜 귀엽다,” 하며 모두 찬양의 수다를 떤다. “란씨는 친환경주의자예요.” 영씨가 신참인 나에게 귀뜀해 준다.
같이 걷고 있는 노병(?)들은 18년째 아침마다 함께 걸어온 발자국 식구들. 나로 말하자면 나이 들고 병들어 가는 내 몸에 재활(?)의 길을 줘야겠다 싶어 신병으로 입단식 한지 이제 딱 한 주일째. 따라서 내겐 다 낯선 얼굴들이다. 이 그룹의 대장 이 선생은 나이는 선배지만 정정해 앞장서서 잘도 걸으신다.
“입단을 환영합니다. 모두 인정 많고 이웃 잘 돌보는 좋은 분들입니다”하며 맞아 주었다. 그래도 긴 세월을 같이 지낸 터줏대감들인데 혹 텃세라도 할까 싶어 눈치 살피며 끼어든 신세. 18년째인 이들은 눈 감고도 걸을 수 있지만 난 아니다. 울퉁불퉁 돌들이 삐죽삐죽한 산길, 굽어 돌면 지난밤 쏟아진 소나기에 젖어 미끌미끌한 흙탕길, 그 낯선 길을 초행부터 엉덩방아 찧어 망신할 순 없다. 내 눈은 발에, 아니면 발이 닿는 땅에만 박혀있다. 그런 내 코에도 란씨는 화면을 들이민다.
“예쁘네요.” 보는둥 마는둥 인사하는데 발이 미끈한다. “아이코!”내 눈은 흔들 하며 떨리는 발로 다시 간다. 난 이렇다 할 해결책 하나 없으면서, 죄 많고 말썽 많은 세상 문제 다 이고 지고 가는, 그래 등이 휘어버린 늙은이, 코가 석 자나 늘어난 늙은이 티내며 사는 신세다. 속으로 생각한다. “아니, 이 할머니들은 자식 손자 자랑을 18년간 하고 나더니 자랑거리 다 떨어져 이제는 토끼자랑까지? 그런들 어찌해? 날 끼워 준 것만도 감사하고 입 다물어야지. 자식자랑은 5만 원, 남편자랑은 10만 원, 손자자랑은 15만 원 내라던데 그럼 토끼자랑은 얼말까?” 속으로 웅얼거려본다. 발이 또 미끌한다.
“정말 귀엽네. 집에서 토낄 키우시나 봐.” 영씨가 란씨한테 묻는다. “웬걸요. 어쩔 수 없이 그리됐어요. 내가 텃밭 가꾸길 즐기잖아요. 올해는 무, 배추, 도마도, 오이, 돌아가며 초봄부터 밭갈이 준비를 그야말로 단단히 했지요. 혹 사슴이 나보다 먼저 따 먹을까 봐 탄탄한 울타리도 높이 치고요.”“그런데 웬 토끼 밭이래요?” “호박, 오이들이 자라 열매 맺을 즈음 우리가 3주간 여행 다녀오게 됐어요. 짱짱한 울타리 쳤으니 걱정할 것 없다 싶어 안심하고 간 거죠. 집에 오자마자 텃밭으로 먼저 뛰어갔지요. 주렁주렁한 오이 호박 꿈에 젖어서요. 근데 뭔가 뛰쳐 도망가는 게 보이더군요. 뭐지? 내 집에? 하며 가까이 가서 보니까 새끼 토끼가 세 마리나 텃밭 속에서 꼬물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 소리에 내 귀도 솔깃해진다. “글쎄 키 큰 사슴 걱정은 했지만 키 작은 토끼 걱정은 미처 못했잖습니까? 이놈의 토끼가 울타리 친 내 텃밭을 자기 집 울타리로 삼고 그 안에서 새끼 낳아 키우더라 이겁니다.” “어머머! 토끼 남편도 있던가요?” “큰놈은 하나밖에 뵈질 않으니 애비 없이 에미혼자 키우고 있는 것 같아요.”
“세상에! 어쩌면!” 모두 감탄사 한마디씩.
“올여름 농사는 다 날아갔어요. 텃밭이 토끼굴이 되어 버렸으니. 사진 좀 보세요. 요 큰놈이 엄마고 쪼끄만 놈들이 새끼들이죠.” 란씨는 스마트폰을 다시 내민다. 먹으려고 심었던 푸성귀는 흔적조차 알 수 없이 엉클어진 푸른 풀밭에 노르끄레한 토끼가 귀를 쫑긋하니 세운 채 까만 눈을 열심히 반짝대고 있다. 눈 붉고 털 하얀 집토끼가 아니고 야생 토끼다. “내년에도 계속 토끼 키우실 거예요?” 영씨가 물었다. “동네 법에 걸려 쫓겨나게요? 안 돼죠. 새끼들이 커서 나가 살 수 있게 되면 다 내 보내고 텃밭도 갈아뭉갤 생각이에요. 지금이야 어쩌겠어요? 어린 자식들 키우느라 애쓰는데 쫓아낼 수는 없잖겠어요?” 그러면 토끼가족은 안심이네.
그런 인정이 모인 곳이라면 나도 일단 안심해도 되겠네. 내 입이 빙긋한다. 그 정도면 떨리고 흔들리는 발이 탄탄해질 때까지 내가 설 자리도 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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