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나이가 된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친구는 제 2의 자신이다” “친구들에게 기대한 것을 친구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난 개인적으로 ‘동무’란 단어를 정겹게 생각해왔다. 어깨동무, 길동무, 말동무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무는 가까운 벗을 허물없이 부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동무란 단어를 쓰면 오해받는다.
사람의 일생이 생로병사이듯 단어들도 그런 것 같다. 이 순간에도 단어들이 태어나고 죽고 있다. ‘동무’란 단어는 변화가 되어 발전한 게 아니라 변질되어졌다. 북한에서 ‘혁명을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벗’이 ‘동무’의 정다운 표현을 대신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나의 친구”라는 말씀을 읽고 한동안 신기해 하며 지낸 기억이 있다. 그리고는 ‘친구’라는 단어가 들어간 찬송들을 찾아서 부르면서 느꼈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성경에서 ‘친구’의 의미는 좋아한다는 뜻이다.
괴테는 노년의 삶은 ‘상실의 삶’이라며 ‘건강, 일, 돈, 친구, 꿈’ 다섯가지를 상실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친구를 더할 수는 없을까? 난 클라리넷 팀을 통해 음악이라는 도구로 인해 마음도 나누고 삶도 나누는 친구를 많이 만나고 있다. 또 헬라어 강의를 통해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며칠전 시카고에서 다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들에서 오히려 내가 도전을 받고 돌아왔다. 나를 성장시키는 진정한 친구들임에 틀림없다. 구약성경 이사야라는 책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란 말씀이 있다.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읽다가 크게 기뻤다.
‘채찍’이란 단어의 동사를 찾아보니 ‘끈으로 묶다, 연합하다, 교제를 하다, 가입하다’ 등으로 나온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친구’와 같은 어원이다. 그리고 ‘샬롬 카베림(안녕 친구여)”이라는 이스라엘 포크송에 있는 ‘카베림’은 친구들이라는 복수형이다. ‘채찍’에서 나온 말이다.
'샬롬’은 ‘완전함, 건강, 안전, 만족, 평안’ 등으로 쓰인다. 날 위해 채찍에 맞은 친구덕에 이런 완전한 쉼을 얻는 나를 보며 나도 이런 친구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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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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