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에는 빛에 반사된 유리병과 빵, 껍질을 벗기다만 과일이 놓여 있었다. 넘어진 유리병에는 주변의 음식들이 반사되어 비추고 있었다. 하얀 테이블보는 이제 막 식사를 마친 이후인 듯 구겨져 있고, 접시 위에는 아직 손을 대지 않은 커다란 크랩(Crab)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1654년 애브라함 반 베이렌(Abraham van Beyeren)의 "Still Life with a Crab"이라는 작품이었다.
주말 오전 스탠포드 대학 안의 캔터 아트센터는 평소에 비해 한산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던 관람객들에게 도슨트가 물었다. 그림 속의 크랩이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나요? 삶이란 테이블에 남아있는 크랩과 같이 유한했다. 이 그림은 17세기 어느 날로부터 지금까지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유한한 삶에 대한 메시지를 주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우울하거나 슬픈기 만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유한하기에 지금 이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라는 강렬한 메시지였다.
앞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슨트를 따라 다음 작품으로 이동한 후에서야, 나는 작품과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혼자 그림과 마주하게 되자, 신기하게도 그림은 내게 다른 이야기를 건네었다. 앞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림은 분명 내게 삶의 유한함을 보라 말하고, 그래서 지금 열심히 살아가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림은 내게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닌가.
내게 말을 건네는 것은, 크랩 옆에 아무렇게나 넘어져 있는 병, 먹다 남은 과일, 투명한 병 속에 비춰진 복잡하게 얽힌 음식들이었다. 크랩과 같이 유한한 삶이었지만 존재함이었다. 넘어지고 깨지고 아픈 삶일지라도 그곳이 테이블과 같이 작은 공간일지라도. 서로 얽혀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우리의 삶이니 괜찮다고. 크랩이 경고를 주었다면, 넘어진 병은 위로가 되었다. 그 병은 넘어져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삶을 투명하게 비추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고 있었다. 그들과 얽힌 음식들은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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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씨는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고 20여년간 Capgemini Ernst & Young Korea, 삼정 KPMG Korea 등에서 IT Project PM 및 Consultant로 일했다. 현재 산호세 새하늘한글학교 교사, SF한국문학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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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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