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하게 솟아오른 잡초들은 봄날이 절정으로 내달리고 있음을, 이 밭 주인이 몹시 게으르고 무심했음을 또렷하게 증언했다. 쭉 뻗은 꽃대 끝에서 씨앗을 부풀린 냉이와 민들레는 번식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아직 연한 망초와 별꽃, 둑새풀, 어디서 딸려왔는지 모를 외래종 돼지풀도 밭 곳곳에서 자기 지분을 주장하고 있었다.
쪽파와 상추가 심긴 곳의 잡초를 먼저 제거하기로 했다. 전날 내린 비 덕에 땅은 촉촉했다. 손으로 살짝 당기기만 해도 풀들이 쏙쏙 뽑혀 나왔다. 그 재미에 취해 시간 가는 것도 잊었다. “쉬엄쉬엄해라. 모르는 이가 보면 대단한 농부 납셨다고 감탄하겠네.” 커피와 빵을 들고 내려온 엄마 목소리를 듣고서야 뻐근한 허리를 곧추세워 지나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손길을 거쳐 말쑥해진 밭을 보니 숨통이 좀 트였다.
밭에 오지 못한 석 달여 동안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비슷한 일을 하느라 바빴다. 1월 초부터 4월 중순까지, 다섯 개의 원고를 돌려가며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을 반복했다. 출판 편집자의 일이란 밭을 가꾸는 농부의 삶과 많이 닮았다. 길가에 피어난 별꽃과 민들레는 산책자에게 어여쁜 존재이지만 농부에게는 늦기 전에 뽑아야 할 잡초에 불과하다. 가령 ‘우리들이 함께한 시간들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되어 가슴 설레이게 한다’는 누군가에게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서술이지만, 편집자는 잘못된 맞춤법 범벅인 이런 글 앞에서 딸꾹질이 날 만큼 신경이 곤두선다.
주술 관계가 어긋난 문장, 화려한 수식어로 위장한 무논리의 문맥, 피동문과 과거완료, 대과거 시제를 남발하는 서술어도 가차 없이 솎아내야 할 대상이다. 더러 매끈한 문장 속에 매복한 오류들까지 바로잡은 후 원고 본연의 가치와 장점을 극대화해내는 편집자의 삶은 적잖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요구하지만, 그 못지않게 독특한 쾌감을 안긴다. 그건 고된 밭일을 마친 후 작물들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아름다움이나 풍요의 메타포에 심취하는 농부의 마음과 유사할 터다. 여기에 현실의 풍작까지 동반한다면 더 말할 나위 있을까.
깨끗해진 상추 이랑에 토마토 오이 가지 호박 같은 열매채소와 민트 바질 같은 허브채소 모종을 잇대어 심었다. 옥수수와 검은콩 씨앗도 두 줄씩 땅에 묻었다. 남은 밭에는 시차를 두고 고추와 들깨를 심으면 된다. “한데, 밭 가장자리는 뭐에 쓰려고 빙 둘러 공간을 남겨뒀다니?” 엄마가 이상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을 때 나는 차 트렁크에 숨겨뒀던 묘목 상자를 꺼냈다.
“이게 요즘 핫하다는 삼립국환데 말이야, 식감도 약효도 끝내줘서 3년 뒤 수확할 무렵에는 얘들 덕에 어쩌면 나도 부농이 될 수….” 실실 웃어대는 딸을 보며 엄마는 혀를 찼고 나는 아랑곳없이 삼립국화 심는 일에 열중했다. 헛된 꿈일지언정 현실의 고단함을 상쇄하는 데는 낙관만큼 좋은 약이 없다는 걸 출판 편집자로 사는 동안 물리도록 체득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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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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