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흣과 아스라이 사이
‘아스라이 뭍이 보이고...’
멀리가 아니라 ‘아스라이’, 육지가 아니라 ‘뭍’이라. 책을 읽다말고 눈으로 마음으로 다시 보고 또 본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느낌이 가슴 저 밑바닥을 건드리는 단어들이다. 학생들에게 이 말 너무 좋지 않으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저 선생님이 좀 이상하다는 듯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받아쓰기’를 ‘바다쓰기’로 쓰는 녀석도 있는데 바랄 것을 바라야지... 한국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한자어는 물론이고 순우리말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아름드리, 고즈넉하다, 시나브로 등의 말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공감할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이 순우리말이나 어려운 한자어와 점점 멀어지는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신조어와 유행어가 차고 넘친다. 언어의 급속한 변화로 인해 근래에 한국을 다녀오신 분은 그곳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까지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말이란 것이 새로 태어나고 변하고 사라지는 생리를 가졌으니 한국의 청소년들이 므흣, 얼짱, 쌩얼, 훈남, 샤방 등의 단어를 만들어 내고 사용하는 것도 누가 나서서 말릴 일이 아니다. 새내기라는 단어처럼 나중에는 사전에 등재되면서 표준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아주 속된 말이 아니고서야 새로운 단어가 생긴다는 것에서는 별 거부감이 없다.
예전에 내가 걱정됐던 것은 태평양 거리만큼이나 이곳의 한국어와 모국의 한국어가 서로 달라 통하지 아니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이곳의 영어에 능통한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더 나아가 한국 문학을 알고 그리하여 한국 문학 작품이 번역되어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고 언젠가는 우리의 숙원이던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에 일조를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는데 한국말의 그 깊은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새로운 말의 흐름도 쫓아가지 못하면 어쩌지 싶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곳의 한국적이면서 미국적인, 미국적이면서 한국적인 말들의 흐름을 즐기며 바라보고 있다. 꼭 아스라이, 시나브로 등의 느낌을 알아야 하고, 샛노랗다, 붉으죽죽하다 등의 느낌을 알아야 우리의 시를 번역하고 소설을 번역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말로 쓴 우리 문학이 국문학이라는 것도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는 정의로 여겨진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국 사람이 다른 나라 말로 한국에 대해 쓸 수도 있고, 한국에 사는 혹은 살았던 외국 사람이 다른 언어로 아니면 한국어로 글을 쓴 것도 있을 수 있고 한국에 사는 사람이 한국어로 쓴 것도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 싶다. 세계화로 인해 상품이나 문화가 혼재되어 나타날 수 있듯이 문학 장르도 국경이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이곳 아이들이 학교 안 가는 날을 학교 없는 날이라고 말하는 특이함, 찌개를 찌게라고 써 놓은 대다수의 음식점들, 이제는 그런 말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언젠가는 미국에서는 찌게가 맞는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하며 이곳에서의 한국말의 성장과정을 지켜본다.
하지만 이곳 한국 학생들의 영어가 섞인 우리말을 느긋하게 바라보면서도 바라건대 우리말과 우리 문화와 영어를 아우르는 제자가 하나쯤은 나와서 한국말로 된 문학작품을 영어로, 영어로 된 문학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해 좋은 작품을 더 많은 세상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