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조차 싫은 열세 살이었다. 평양의 한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던 소녀는 어느 날 집에 있다 어디론가 끌려갔다.
“뭘 하러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어요. 처음에 도착한 곳은 만주였어요.”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소녀의 삶은 거기서 멈춰 섰다. 일본군들은 초경도 하지 않은 철부지 소녀에 만행을 일삼았다. 어린 그가 반항하면 내려진 건 매와 폭행이었다.
“가자마자 성병에 걸렸어요. 그런데도 계속 약 먹으며 일본군들을 받아야 했어요. 위안소에 틀어박혀 하루에 스무 명 이상의 일본인에게 당했습니다. 술 취하면 칼로 찌르고 때리고…. 그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그런 일을 시켰으니 그저 눈물만 났지요.”
얼마 후 중국 본토로 옮겨 갔지만 지옥 같은 생활은 계속 됐다. 해방이 되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열여섯 소녀는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리운 고향에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 몸으로 어떻게 고향엘 갑니까. 신분을 감추고 숨어살았어요. 날품팔이 생활을 하며 결혼도 못하고 살다 병원에서 생모가 포기한 아이를 데려와 내 아들처럼 키웠어요.”
70년이 다된 과거를 되짚는 길원옥 할머니(82)의 목소리는 자꾸 떨렸다. 길 할머니가 ‘세상’에 나온 건 2000년대 초반. TV에서 한 위안부 할머니가 울며 증언하는 걸 보고 한마디 하다 며느리에 그만 들키고 말았다. 그날 길 할머니는 60년 세월 동안 가슴 속에 꽁꽁 감춰두었던 사연을 꺼냈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냐고 아들이 더 울대요. 정대협을 찾고서야 내가 죄인이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위안부 시절을 증언하는 게 처음엔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내가 증언을 해야 나 같은 피해자가 안 생긴다는 생각에 나서게 됐습니다.”
그는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대협의 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네바에서 열린 93차 ILO 총회, 유럽연합 의회 결의안 채택을 위한 순회 캠페인 등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아무리 먼 길도 마다않고 달려가고 있다.
워싱턴에 온 것도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미국 여론에 호소하려는 목적이다.
그는 “한국의 할머니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아직까지 일본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죄 한마디 못 받았다”며 “그럼에도 일본은 할머니들에 배상했다는 거짓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고 분개해 했다.
길 할머니의 소망은 간결하다.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고 공식적으로 배상하는 것. 그래야 죽어서도 눈을 편히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한다. 길 할머니는 “이제 남은 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며 “동포 여러분들께서 미국 여론을 움직여 일본에 압박을 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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