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7월29일 가쓰라 다로 일본 제국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 미국 육군장관이 도쿄에서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밀약에 따르면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통치하는 것을 용인하는 내용이다. 이 밀약으로 일제는 ‘미국의 축복 속에’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탄 조약을 강제로 조인하여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마침내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한국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최초로 38도선에 경계선을 긋기로 한 결정은 같은 해 8월10일과 11일 사이에 미 국무부와 육군성, 해군성 등의 합동철야회의에서 채택된 것이었다.
육군성의 찰스 본스틸과 딘 러스크 대령은 옆방으로 물러가 소련측에 제시할 제안을 작성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들에게는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 미국의 군사적 편의주의에 따라 30분 만에 두 육군 대령이 멋대로 그은 38선은 이내 민족상잔을 통한 분단 고착화로 이어진다.
1950년 6월25일 새벽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즉각 참전을 결정하고 대규모 전투 병력을 파견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하기까지 실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던 한 나라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던 국민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부름에 응답했던 우리나라의 아들과 딸들을 기립니다.’ 워싱턴 DC 한국전참전기념비 입구 바닥에 쓰여져 있는 문구다. 미군 전사자 5만4,246명, 실종자 8,177명, 부상자 10만3,284명. 지구상에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나라(한국)와 국민(한국민)들을 위해 그토록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신명을 바쳤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이 실패했더라면 아마도 오늘의 한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일본과 밀약을 맺어 한국을 버리고, 신군부의 광주민중항쟁 유혈진압을 묵인하는 등 한국민들에게 많은 고통과 상처를 줬지만 그럼에도 한국민들이 미국에 우호적인 것은 조국의 공산화를 앞장서 막아준 데 대한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고마움의 중심에 맥아더 장군이 있다.
한국전 기념재단 명예회장인 임용근 전 오리건주 상원의원이 최근 한국에서 일부 시민단체가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대해 이는 미국민과 장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장군의 동상을 미국으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
이미 지난 2004년 당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헨리 하이드 위원장 등은 같은 이유로 차라리 동상을 미국인들에게 양도해줄 것을 제안하는 서한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한 바 있다. 이에 노 대통령은 “맥아더 동상은 우리의 역사다. 나쁜 것은 나쁜 대로 좋은 것은 좋은 대로 기억해야 한다. 동상을 그대로 두고 역사로서 존중해야 한다”며 철거반대 입장을 밝혔다. 대다수 한국민들의 정서 또한 그 같은 노 전 대통령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친미와 반미를 떠나 역사적 유물로서 장군의 동상이 있어야 할 곳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