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위질 52년...단골 있어 아직은 버틸만해요
우리이발관의 천혁기 이발사가 손님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손질하고 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계단을 굽이굽이 걸어 올라간 뒤 철문을 열자 영어회화 강의가 흘러나온다. ‘잘못 찾아왔나’ 하는 순간 한눈에 보기에도 세월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베테랑 이발사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10년 넘게 우리이발관을 이용하는 타인종 손님이 4~5명 정도 되는데 영어가 짧으니까 말이 안 통하잖아요. 은퇴하기 전에 그동안 고마웠다며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나이 칠십이 다돼서야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했는데 쉽지 않네요. 허허허~”
퀸즈 플러싱 유니온스트릿 선상에 위치한 우리이발관을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천혁기 이발사.
이제는 대표적인 사양업종이 돼버린 이발관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천 이발사는 경력 52년의 외길인생을 걸어온 이발 역사의 산증인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쫄쫄 굶었던 1960년대 보릿고개 시절에 입에 밥풀이라도 칠해보자는 생각에 열여덟에 시작한 이발사일이 평생 직업이 됐다.
한 때는 ‘한국에 가서 다른 건 다 못해도 이발관은 꼭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최고의 기술과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호황을 누렸던 이발관은 1994년 IMF위기 이후 퇴폐업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각 집마다 부인들이 남편과 자식들을 이발관에 보내지 않기 시작하면서 손님이 절반 이상 줄어버렸고, 미용사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세련된 기술로 이발사들을 앞서나가기 시작하면서 단골 손님들마저 미용실에 빼앗겨 버렸다. 여기에 이발 기술을 배우려는 후계자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서 사실상 명맥이 끊겨버렸다.
“오죽했으면 짜장면 배달원을 했으면 했지 이발 기술은 배우지 말라는 애기가 나왔겠어요. 돈이 안 되고 미래가 불투명한데 누가 기술을 배울라고 했겠어요”
제2의 인생을 꿈꾸며 13년 전 뉴욕에 왔지만 이곳에서도 이발사의 미래가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를 포함해서 플러싱 지역 이발사들이 다 60세 이상이예요. 이 분들이 죽고 나면 이발관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거죠. 상상만 해도 너무 안타까워요”
이제는 젊은이들을 한 명도 볼 수 없는 이발관이 됐지만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는 힘은 아직도 그의 가위질에 매료돼 찾아와주는 단골 손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개업 첫날부터 10년 넘게 우리이발관을 이용해 오고 있다는 단골 함재균씨는 “제게는 단순히 이발사가 아니라 아버님 같은 분입니다. 제사업이 어려웠을 때는 1년 넘도록 절반 가격밖에 받지 않으셨고, 자식들과 함께 올 때는 오히려 아이들이 용돈을 받아 갈 정도였으니까요.”
‘이발사는 가장 정직하고 양심적인 직업’이라고 강조한 천 이발사는 “보스턴과 뉴저지에서 톨비를 내면서까지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을 보면 너무 고맙고 힘이 됩니다.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이분들이 저를 기억하고 찾아와주니 저는 이 세상 누구보다 부자입니다.”<조진우 기자> 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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