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지역에서 오랫동안 코리안 콘서트 소사이어티를 창립하여 한인 음악인들에게 등용문을 마련해주고 후원해주던 방은호 초대회장이 88세 미수를 맞이하여 마지막 무대를 마련한다.
본인은 약사로서 살아오셨지만, 음악인들을 사랑하고 후원해왔던 방은호 회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마지막 무대를 그 나이에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열정과 노익장에 감탄 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아버지인 고 방훈 목사의 순교 60년을 기념하여 마련한 이번 음악회는 아들로서 이북에 6.25때 납치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의 정을 보여주고 있다.
방훈 목사는 경기 강화도에서 1891년 태어나 1922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일제 강점기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일제 때 수시로 감시와 탄압을 받으면서 강릉, 제천, 진천, 강경 등 지방에서 목회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중곡교회, 상동교회 등에서 목회를 이어갔다
1937년에는 경성남지방 감리사, 이화학당 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6.25동란 때 납북된 이후 제대로 생사여부도 알지 못하였는데 탈북자에 의하면 탄광의 광부로 일하는 것을 봤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그 당시 많은 목사들이 납북되었는데 양주삼 목사, 김유순 목사, 박연서 목사 등도 같이 끌려갔다고 한다.
당시 방은호 씨는 미국에 유학을 와서 약학대학을 다니고 있어, 아버지 방훈 목사를 끝내 다시 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고 회고한다.
특별히 방 목사가 1943년 경성약전(서울 약대의 전신)에 입학하려는 방은호씨에게 신학대에 입학하기를 권유했으나 끝내 약대로 진학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아버지와 영영 이별하게 된 것을 불효로 느끼면서 아버님을 기리는 음악회를 연단다.
방은호씨는 1948년 일리노이 대학으로 유학와서 공부를 마치고 1955년 볼티모어에 이사와 이 지역에 사시면서 약사로서 신앙인으로서 또 1980년 한인 2세 음악인들을 키우기 위해 코리안 콘서트 소사이어티를 조직해 20여년 동안 케네디 센터등에서 연주회와 음악회를 주선한 열정과 동포들을 사랑한 초창기 이민자이시다.
이제 미수(88세)를 맞아 무대에서 사라지는 주역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이번 음악회가 귀하고 뜻 깊은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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