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상박
요즈음 한국 신문이나 방송에서 흔히 쓰는 말에 ‘전설’이란 두 글자가 있다. 본래의 뜻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국어사전에는 되어 있지만 그 의미가 확대되어 어떤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으로 최고 정상에 군림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을 지칭하는 말이 된 것 같다.
지난 26일 서울 한국기원에서는 세계적인 바둑대국이 벌어졌다. 미주한국일보 27일자 신문에도 보도되었던, 일본기원 소속의 조치훈(59) 명인과 한국의 영원한 바둑 국수 조훈현(62) 9단이 벌인 전설들의 반상대결이다.
현대바둑 70년 기념대국으로 치러진 승부는 아쉽게도 조치훈 9단의 시간패로 154수만에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바둑은 박빙(薄氷)의 승부대결로 용호상박하는 경기를 보여주었다.
목숨 걸고 둔다
바둑이 고대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기도(棋道)로 승화되고 화려한 꽃을 피웠지만, 일본은 바둑의 선진국으로 자부하며 전 세계에 바둑문화를 보급하면서 자국의 전통 기예처럼 취급하였다.
6.25전후 당시 한국 바둑문화는 낙후(落後)했으며 모든 면에서 일본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 현대바둑사의 대부인 조남철 국수도 일정 때 도일하여 기따니 바둑도장에서 각고의 수련으로 입단면장을 받고 한국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하였었다.
실제로도 한일 간에는 바둑의 실력 격차가 심했다. 이에 한국 바둑계에서는 고심 끝에 장기적으로 생각하여 어린 바둑영재들을 일찍부터 일본에 유학 보내 실력 격차를 극복하고 한국바둑의 중흥을 이루어보자는 여론이 일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선발된 영재소년이 당시 6살의 천재소년 조치훈이었다. 그것이 1963년, 반백년이 넘는 52년 전의 일이다.
어느덧 일본에서 조치훈의 나이 11살. 이번에도 입단 못하면 한국 집으로 돌아간다는 차갑고 냉정한 말이 형 조상현 씨의 입에서 나왔다. 유난히 추운 일본의 1월 엄동설한에 바둑도장에서 집으로 가는 밤길을 걸어가며 입단대회 전날 형제간에 나눈 대화이다.
1년에 한 번씩 연초면 열리는 프로 입단대회. 벌써 네 번째 낙방을 하고 다섯 번째의 입단대회 출전이었다. 조치훈 형제들의 일본 생활비를 보내주는 부모님과 후원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생각들이 너무 무서웠다고 회고하는 어린 소년 조치훈. 그때부터 조치훈의 굳센 다짐인 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이 나왔나보다. 천재소년에게 기대하는 많은 눈길이 어린 조치훈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기원 사상 최연소 입단
아무튼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1968년 일본기원 역사상 최연소인 11살의 나이로 그는 당당히 프로로 입단한다. 드디어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 후로도 매년 기록을 경신하며 초고속 승단을 하면서 일본바둑을 제패하기 위한 조치훈의 바둑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1980년 조치훈은 일본의 최고 타이틀인 명인을 획득하게 된다. 프로에 입단한 지 12년만의 일이다.
그리고 한국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 하게 되어 한국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게 된다.
당시 한국의 조훈현 국수 역시 전성시대로 돌입하여 한국의 바둑 타이틀이란 타이틀은 다 휩쓸다시피 하여 전대미문의 9관왕에 오른 시기였다. 그래서 두 전설의, 최초의 용호상박의 대결이 벌어졌었다.
일본을 제패한 조치훈 명인과 한국을 제패한 조훈현 국수의 혈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1차와 2차에 걸친 조(曺)-조(趙) 바둑대결은 조치훈 명인의 연승으로 끝났으며 조훈현 국수는 지금도 뼈아픈, 잊지 못할 통한의 패배를 당한 바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 벌써 35년 전의 이야기다.
-아직도 살아있는 전설
그동안 조-조 대결은 총 14번의 대국이 이루어졌었다. 조훈현 국수이 9승, 조치훈 명인이 5승이다. 승률 면에서는 조훈현 9단이 앞선다.
그러나 아직도 양대 전설은 한국과 일본에서 초로(初老)의 흰머리를 날리며 지칠 줄 모르는 승부사로 군림한다.
지난해 조훈현 국수는 국내 타이틀 시니어 기왕 하나를 더 추가하여 한국 최다 타이틀 보유기록 158개로 자기 최고기록을 경신했다.
일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조치훈 명인도 지난달 12일 일본기원 주최 제4기 마스터스컵에서 타이틀을 획득하여 자기의 일본 최다 타이틀 보유기록을 경신하여 통산 73개의 신기록을 세웠다.
양대 바둑천재들은 각자 일본과 한국의 바둑을 정복하고 아직도 살아있는 전설로 현대바둑 역사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choi1581@daum.net
풍운재 최환정(Charles Choi)
미국바둑협회(AGA) 공인 7단
워싱턴바둑동호인회 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