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부동산업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김석화 부동산 중개인은 맨하탄 32가 한인타운의 터줏대감으로 지난 28년간 맨하탄 한인 소유 건물 매매에 관여해왔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한국 해양대학교 기관 전수과를 졸업, 한국 최초의 프랑스 조선소 파견팀을 인솔했던 베테랑 엔지니어 출신이다.
2년간 프랑스 낭뜨 조선소에서 근무후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엔지니어, 미해군 민간 엔지니어로 하와이 진주만서 1년간 근무, 월남 다낭 해군발전소에서 2년간 근무 등 해외 기술자로 근무한 후 결혼 후 1970년 뉴욕으로 이민왔다.
뉴욕시 발전소 엔지니어로 미국에 첫발을 디딘 그는 우연히 지인의 주택 구입을 통역해주다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타고난 건강한 체질과 소탈한 성격, 성실성, 지구력, 설득력 있는 화술 등은 부동산 중개인이란
직업에 딱 맞았다.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1979년 웨스트 32가 38번지에 ‘김석화 부동산’ 사무실을 연 뒤 1986년 브로드웨이 1220번지 소재 지금의 사무실로 이전하고 지금까지 맨하탄을 떠나지 않고 상용 부동산 매매를 전문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굵직굵직한 한인 소유 건물 매매가 그의 손을 거쳤고 아직도 맨하탄 건물 구입 관련 한인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고 한국의 부동산 투자자들까지 그의 사무실을 찾고 있다.초창기 한인들의 건물 공동 투자를 위해 발로 뛰었던 그는 “한 건물에 100명까지도 공동 투자하는 중국인들에 비해 한인들은 아직도 공동 투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부동산 시장 호황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89년 도미니카 공화국에 발전소를 건립하려다 수백만 달러를 날려, 하루아침에 집을 차압당하고 빚더미에 앉는 청청벽력과도 같은 시련을 겪게 됐다.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재기하는데 꼬박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하나님은 견딜 만큼만 시련을 준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낙천성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며 고객들의 신뢰를 쌓아갔다.
그는 “자녀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밝은 성격 잃지 않고 장학금으로 공부하며 부모 걱정을 덜어준 생각을 하면 아직도 고맙고 눈물이 난다”며 “늘 자녀들과 대화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가져, 알아서들 잘 자라 준 것 같다”고 말한다.
부인 공혜경씨와의 사이에 현재 버지니아서 치과개업의인 큰아들 울슨, UC버클리대학에서 심리학 석사학위를 취득, 현재 크놀 가구 회사 마케팅 매니저인 딸 수잔, 그리넬 칼리지를 나와, 로스 백화점 구매담당을 거쳐 현재 캘빈 클라인의 구매담당 매니저로 일하는 아들 탐 등 2남1녀를 두었다.
<김진혜 기자> jh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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