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3척의 범선으로 출항
제노바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41~1506)는 한동안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우주구조학을 배운 뒤 바다에 마음이 끌려 항해술을 배웠다. 열정과 의지가 강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그는 항해에서 여러 차례 성공한 후 포르투갈에 정착했고 국왕에게 서방으로 항해해 인도로 가겠다는 계획을 올렸다. 하지만 당시 포르투갈 국왕이 아프리카 식민지 확보에 열중하는 바람에 콜럼버스는 하는 수 없이 스페인 왕에게 의지했다.
스페인 왕 페르난도와 여왕 이사벨은 오랫동안 확답을 주지 않고 회의만 거듭하면서 그를 붙잡아두었다. 우선 제독의 지위를 요구한 콜럼버스는 새로 발견하는 전 영토에서 자신에게 부섭정직을 주고 진귀한 재물의 10분의 1을 달라고 했다. 나아가 그는 아직 받지도 않은 재물을 욕심 많은 귀족들에게 판매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마침내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팔로스 Palos 항구는 콜럼버스를 위해 세 척의 카라벨형 쾌속범선, 즉 100톤의 산타마리아호, 50톤의 핀타호, 40톤의 니나호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산살바도르에 상륙
1492년 9월 3일 제독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그리고 영국인과 유대인 각각 한 명씩으로 구성된 여든여덟 명의 선원과 함께 스페인을 출발했다. 항해는 비교적 순조로웠고 그들은 5주간 쉬지 않고 항해했다. 하지만 배가 육지에서 점점 멀어지자 불안감을 느낀 선원들은 명령을 거역하려 들었고 뱃머리를 되돌리자고 간청했다. 콜럼버스는 그때까지 항해한 거리를 숨기고 그들을 달래면서 곧 손에 들어올 금은보화 이야기를 하며 진정시켰다.
10월 11일 핀타호의 선원이 물에 떠 있는 갈대와 풀잎을 발견하자, 콜럼버스 제독은 가장 먼저 육지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왕과 여왕이 약속한 1만 마라베디 maravedi(스페인의 옛 금화)와 명주로 만든 속조끼를 주겠다고 말했다.
10월 12일 육지가 나타나자 콜럼버스는 그곳을 산살바도르 San Salvador라고 명명했다. 그곳에는 ‘4월에 안달루시아 Andalusia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모든 선원이 〈신에게 영광이 있기를〉이라는 성가를 합창했다. 콜럼버스는 그곳을 인도라고 믿었으나 사실은 바하마 Bahama 제도의 한 섬이었다.
-원주민들 보고 놀라
이상한 광경에 이끌린 원주민들은 해변에 열을 지어 늘어서기도 하고 통나무를 파서 만든 배를 타고 모여들기도 했다. 거의 벌거벗은 그들은 아무런 불안감도 보이지 않았고 무기도 겁도 없었다. 콜럼버스는 그들이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그들이 배에 올랐을 때 군도를 보여주자 덥석 잡는 바람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콜럼버스는 그들에게 유리구슬과 작은 방울을 내주고 식량과 교환했다. 그는 그곳에서 “내가 보기에 그들을 쉽게 그리스도교도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록했다.
항해를 계속한 콜럼버스는 쿠바와 아이티를 발견했는데, 그는 그곳을 일본으로 착각했다. 어딜 가든 그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했다. 금이 있느냐? 향신료가 있느냐? 이곳의 종교는 무엇이냐? 이교도의 누군가가 미개인들의 영혼을 뒤흔든 흔적이 보이지 않자 콜럼버스는 마음을 놓았다. 귀금속에 대해서는 어느 부족이든 이웃 부족이 갖고 있는 재물의 소재지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콜럼버스는 앵무새, 활, 창 그리고 금장식을 한 인디언을 데리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콜럼버스의 유언
그는 국왕에게 일본에 도달해 바다의 여신을 만났다고 보고했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환영을 받은 그는 대양 제독과 인도 부왕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가 그에게는 생애의 절정기였다. 이후 그는 세 번 항해해서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 그리고 남아메리카에 상륙했다.
마지막으로 오리노코 강 하구와 가까운 대륙에 상륙했을 때 그는 그곳을 에덴의 낙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그곳 땅을 탐험하는 동안 반란이 일어났고 그는 발에 쇠고랑을 차고 선창 바닥에 감금된 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그를 구출해주었으나 등용하지는 않았고 얼마 후에는 완전히 잊고 말았다. 가난에 허덕이던 콜럼버스는 1506년 발라돌리드 Valladolid 에서 “자비, 진리 그리고 정의를 사랑하는 분들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기 바란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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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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