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선 제자복도 없으셔! 머리가 아둔하기로 하면 따를 자 없고 덤벙대고 큰소리 치고 막판에 뒤통수치는 베드로 말이다. 토마스는 끝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의심쟁이다.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막판까지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니 누가 보아도 참 이건 심각한 사실이다.
그런데 가장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토마스이다. 의심쟁이 토마스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신앙고백을 한다. 세 번이나 배신한 베드로에게 나타나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결국 베드로가 울음을 터트리게 하는 것도 예수님이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부끄러운 기억들이 적지가 않다. 아니 멀리 멀리 돌아 볼 필요도 없다. 바로 여기 서있는 우리를 보면된다. 바로 우리들! 참 우리들 정말 기가막힐 정도로 일치 못하고 다투고, 서로 의심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참 이런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참 슬퍼진다. 왜? 하느님이 이처럼 아둔하고 약점많고 고집 센 사람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부르셨는지 참 신비스럽다.
내 자신을 돌이켜 보아도 약점투성이다. 이제는 겁이 나고 부끄러워서 돌아보기도 창피하다. 하느님은 왜 우리 같은 죄인들 대신에 천사들을 시켜서 당신의 교회를 지키시지 않았을까 의아스럽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가 거룩하다 하지만, 동시에 죄인들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우리 교회도 세상 모든 단체처럼 추하고 더러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다 겪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굴복하지 않고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불리운 게 아닐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마냥 착하기만 상투스 (Sanctus)가 아니라 과거 있고 문제 많고 골통같은 콘트라 (Contra)들이 역설적으로 교회를 짊어지고 온 게 아닐까? 토마스도 베드로도 바오로도 마리 막달레나도 굵직굵직한 사람들에게는 다 과거가 있었다. 나도 과거가 있는 남자이다. 그래서 신앙의 삶은 대역전의 드라마이다.
그러나 이 제자들을 보면 공통적인 특징은 순수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곧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평생을 목숨 바쳐 교회 건설을 위해 살지 않았던가? 바로 이 점을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순수해야 한다는 것, 자기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마태오 18:3) 말씀처럼, 다시 태어 나야 한다는 니코데모스 대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요한 3:5) 우리 다시 태어 나야 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교회의 사람으로 “참된 제자” 로 우리 다시 태어 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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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현 요셉 신부/팰팍 마이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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